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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부터 천하에 간신은 있어왔다. 기중 전국시대 조(趙)나라 대부 곽개(郭開)만 한 이도 드물 것이다. 시쳇말로 ‘역대급’이다.

조나라 명장 염파는 진(秦)나라 침입에 대비해 보를 쌓고 지구전을 치렀다. 진은 세작을 동원해 “염파는 늙어 겁이 많다. 진 군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한 때 염파에게 ‘소인배’라고 모욕을 당했던 곽개도 맞장구쳤다. 조 효성왕은 지휘관을 조괄로 교체했다. 조는 진과 싸워 크게 졌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효성왕 아들 도양왕은 염파에게 사자를 보냈다. 곽개는 그 사자를 금으로 매수했다. 염파는 사자 앞에서 쌀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어 보였다. 사자는 왕에게 “염 장군은 늙었지만 식사도 잘합니다. 그러나 신과 자리를 같이하며 세 번 오줌을 지렸습니다”고 아뢨다. 왕은 염파를 부르지 않았다.

도양왕 아들 유목왕 6년 지진이 나고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진나라 사람은 웃고/ 조나라 사람은 통곡하리라/ 이것이 믿기지 않는다면/ 맨땅에서 털이 솟아나리다’라는 민요가 나돌았다. 그 다음해 땅에서 한 자가 넘는 흰 풀이 솟아났다. 곽개는 왕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

유목왕 7년 진나라는 조를 칠 태세였다. 조나라는 명장 이목과 사마상을 시켜 막게 했다. 진나라는 곽개에게 많은 금을 주어 “이목과 사마상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고하게 했다. 유목왕은 이목의 목을 베고 사마상을 해임시켰다. 석 달 뒤 조나라는 멸망했다.

곽개는 간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여론을 왜곡했고 좋은 신하를 밀어냈다. 나랏일보다 사익을 앞세웠고, 뇌물을 받아 제 배를 불렸다. 왕을 나쁜 길로 꾀었다.

이를 2200여년 전 일로 치부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도처에서 발견된다. 방위산업 부문만 해도 한 달이 멀다 하고 쌀 몇백 수레, 황금 몇 관짜리 비리가 적발된다. 최근 전·현직 판관들이 짬짜미해 사법권을 주물렀고, 전관들은 시민이 상상도 못할 돈을 거둬들이고 있음이 공개됐다.

재물을 챙겨야만 간신은 아니다. 이익을 좇아 무리를 이루고, 장(長)을 임금인 양 떠받들어 오도하며, 농단하는 것도 간신 짓이다. 아무 일 않고 숨어 자리만 보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와대라는 곳에서는 대통령과 친하다는 몇몇이 십상시(후한 말 영제 때 환관들)로 불린다. 여론을 차단하고 대통령 ‘심기 경호’만 한다는 것이다. 온갖 인사를 이들이 결정한다는 말이 나돈 지도 오래다.

소위 ‘진박’이라는 이들은 나랏일을 하다 지난 4월 총선에 나왔다. 부국강병을 다짐하기보다는 다른 세력을 몰아내겠다면서 몰려다니다 역풍을 맞아 자기 붕당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1회 현충일 추념식을 마친 뒤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와 악수하고 있다._연합뉴스



최근엔 대통령 건강을 놓고 때아닌 시비가 일고 있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아프리카, 프랑스 순방 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길고 빡빡한 일정을 링거로 버티면서 고군분투했다”고 밝혔다. 한데 이번 순방은 시작 전부터 말이 많았다. 국내 사정이 그악해서다.

남북을 둘러싼 미·일·중 힘겨루기 등 동북아 정세는 자심해지고, 경제는 내년이 다가오는 게 두려울 만큼 망가지고 있다. 두 정부에 걸친 대기업 뒤 봐주기는 미세먼지, 가습기 살균제 등 환경의 역습을 불렀다. 강남역 여성 살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등 시민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고 있다. 이쯤 되면 이건 나라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 목숨을 도모해야 하는 ‘정글’에 다름아니다.

대통령은 선친과 인연이 있는 아프리카 국가를 돌아보고, 프랑스에서 42년 전 잠깐 유학한 곳을 찾았다. 추억 여행이라는 지적은 이 때문에 나왔다. 이 판에 ‘링거 고군분투’ 운운하니, “임금께서 백성을 어여삐 여겨 옥체를 돌보지 않고 집무에 임하시니 감읍하라”고 말한 것으로 들린다.

간신은 어떻게 존재하나. 군주의 어리석음이나 교활함이 토양이다. 눈이 어두워 간신임을 몰라볼 때 득세한다. 아니면 왕이 제 욕망을 채우려고 간신을 내세우기도 한다. 결국 부리는 이의 잘못이다.

간신은 야당에도, 야권 유력 주자 옆에도 있고, 기업과 단체에도 있다. 주목받지 않았을 뿐, 말 그대로 편재(遍在)한다.

조나라의 마지막 왕과 곽개는 어찌됐을까. 유목왕은 옛 초나라 땅 방릉으로 압송돼 구금됐다.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곽개는 진나라 왕을 따라 함양성으로 갈 때 황금이 너무 많아 가져가지 못했다. 나중에 옛집으로 돌아가서 뒤뜰에 묻어 놓은 황금을 파내 수레 여러 대에 실었다. 함양성으로 돌아가던 중 습격을 받아 목숨도, 황금 수레도 빼앗겼다. 남은 것은 ‘희대의 간신’이라는 오명뿐이다.



최우규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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