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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박근혜와 봉하로 간 문재인. 같은 날 다른 두 장소에 선 전·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박근혜가 탄핵되면서 세월호가 올라왔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 날 박근혜의 첫 공판이 열렸다. 사필귀정이다.

연일 고공 행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 때문에 U-20 대회의 축구 경기장이 썰렁하다고 한다. 적폐청산과 개혁 드라이브가 “슛! 골인”의 쾌감보다 더 짜릿한 까닭일 게다. 그럼에도 연일 매스컴에는 각계각층이 주문하는 개혁과제가 줄을 잇는다. 그 대열에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인권정책의 과제다.

다른 건 몰라도 문재인 후보의 인권정책 공약은 별 생각나는 게 없다. 공약집에서 애써 찾아보니 문 대통령의 인권정책 공약은 10여개가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도·감청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과 공무원의 민간인 불법사찰 방지법 제정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의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인권의 가치는 바닥을 모른 채 추락했다. 그 한가운데 독립성을 상실하고 본분을 망각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있다. 권력에 쓴소리는커녕, 민감한 사항을 외면했고, 반인권적 결정까지 줄을 이었다. 더하여 인권 감수성과 전문성이 높은 일부 직원들이 쫓겨나고 밀려났다. 촛불 탄핵 정국 이후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예민한 사항에 대해서는 미적대거나 시늉만 내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인권위의 정상화는 문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인권 분야의 첫 번째 과제다. 인권위가 눈치 보지 않고, 오로지 인권의 가치와 원칙에 따라 과감하게 쓴소리를 할 수 있으려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 보장이 필수적이다. 위원장과 인권위원의 임명 과정에서 투명성과 전문성의 확보, 시민사회의 의견 수렴이 보장돼야 한다. 사법부가 3명의 인권위원을 지명하는 것이 타당하고 적절한지도 고려해 볼 점이다. 법조인이 인권위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다. 법조인이 많다보니 인권위의 많은 결정이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 갇히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상상과 국제 인권법 및 국제관습법을 포괄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옷깃에 수용번호 ‘503번’을 달고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인권위의 부침을 바라보면서 얻는 교훈은 ‘인권기본법’ 제정과 같은 안정적인 인권 레짐(regime)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인권의 지속적 보장이 어렵다는 점이다. 정권교체 때마다 인권위 흔들기는 반복될 여지가 크다. 자유·평등 같은 인권의 가치는 기득권이나 특권과의 끊임없는 저항과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권 문제는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인권기본법’은 인권위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인권의제를 상시적으로 논의하고 교육할 수 있도록 각종 제도와 정책을 만들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즉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사회의 여러 단위들이 인권 증진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영향평가를 하며, 인권교육의 제도화와 시민사회의 참여 등을 통해 인권보장의 안전하고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인권의제 중 가장 핫한 뉴스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였다. 인권에 대한 국민적 감수성은 최근 십수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반면 갑질과 같은 불평등과 혐오는 갈수록 만연해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를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또한 미뤄서도 안되는 시대적 과제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평등한 세상으로 만들어 갈 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은 얘기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문제는 기본권 강화를 중심으로 한 개헌이다. 문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정치권은 헌법 중에서 통치권 구조의 변화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헌법은 무엇보다도 인권법이다. 통치구조는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일 뿐이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미국 덴버대학의 크리스토퍼 힐 총장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축은 다수결이지만, 두 번째 축인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공허하거나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했다.

여성·노인·어린이·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평등 보장과 권리 강화는 시대의 대세이자 민주주의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또한 이주노동자, 난민 등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세상에서 일부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는 방안도 심도있게 토론되어야 한다. 촛불의 정신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민주·인권 강국 대한민국 만들기’에 고성능 엔진을 제대로 가동시키길 바란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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