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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캐나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 공영방송 CBC에 소송을 거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2년에 방영된 TV 다큐멘터리 3부작 <용맹과 공포>가 캐나다 공군이 독일의 민간 목표물을 대규모로 공습한 사실을 마치 부도덕한 작전을 수행한 것처럼 묘사하여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2005년 캐나다 전쟁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독일 공습작전을 둘러싼 논란이 재연됐다. 이 작전과 관련한 전시 안내판에 ‘끝없는 논란’이란 제목을 붙인 것이 문제였다. 참전 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인 캐나다 조종사들을 부도덕한 전범자로 취급했다’고 반발했다. 결국 박물관장이 사임했고 안내판은 수정됐다.

1994 년 미국에서는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 전시 기획이 논란이 됐다. 예정 전시물 중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 폭격기가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계속 논란이 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선택한 전시품이었다. 참전 군인들은 자신들이 목숨 걸고 싸운 전쟁이 전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전시라며 분개했다. 정치인, 언론인을 비롯한 보수로부터 불어온 역풍은 거셌다. 미국과 미국 전쟁 영웅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 미국의 과거에 대한 혐오감을 주입하려는 공작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장은 사임했고 전시는 취소됐다.

지 난 20년간 세계 곳곳에서 기억전쟁이 일어났다. 캐나다와 미국의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기억전쟁들이다. 일본에서도 중일전쟁 당시 난징대학살을 둘러싼 기억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참전 군인은 부인하고 대통령은 사과했던 모순적 상황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총성이 멎은 지 반세기가 훌쩍 흘렀는데, 왜 전쟁의 기억을 놓고 세계 도처에서 다툼이 그치지 않는 것일까.

1945 년 이후 우리는 냉전을 경험했다. 냉전시대에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는 서로 경쟁하며 스스로를 인류의 미래라고 선전했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자, 미래로 향하던 세계가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냉전의 살얼음판 아래 숨죽이고 있던 해묵은 갈등과 긴장이 일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동안 지배 이념이나 진영 논리 등에 의해 은폐, 왜곡, 부정되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공개되었고 인류 보편적 가치를 준거로 새롭게 재해석되었다. 냉전보수세력은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이 상징하는 명예로운 삶이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강하게 반발했다. 과거 청산을 무기 삼아 자신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고 간주되는 개인, 집단, 진영 모두를 적대시했다. 무력 전쟁이 끝나고 냉전의 시대도 지나갔건만, 또다시 아와 비아를 가르는 기억전쟁의 시대가 온 것이다.


냉 전에서 탈냉전으로 이행하면서 기억전쟁이 불거졌다는 탁월한 분석을 내놓은 캐나다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은 <역사 사용설명서>에서 전쟁 기억을 둘러싼 기억전쟁의 전장으로 TV, 영화, 신문 등 미디어와 박물관은 물론 학교 교육에 주목한다. 지금 우리에게도 학교교육이 기억전쟁의 격전장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그것이다. 국정론자들은 대개 ‘우리처럼 역사 갈등으로 인한 이념 대립이 극심한 곳이 없으니 국론 통일을 위해 국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만 기억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 도처에서 기억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을 도외시하면서 국론 분열을 야기하는 것은 곧 안보 위기로 이어진다’는 냉전적 사고 역시 국정화의 핵심 근거다. 지 금 세계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억전쟁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어느 한 편에 기울어 기억을 독점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탈냉전의 시대를 살고 있다.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국가의 기억 독점을 의미하는 ‘국론’이란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을 거슬러 국가가 일방적으로 기억 독점을 선포한다면, 그건 유례없는 고강도 기억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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