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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책이 있고 가을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을은 파주에서 시작된다.
이 가을을 위하여 잉크 냄새 가득한 축문 한 묶음을 바친다. 출판사 일조각 도서목록이다. 목록이름 1953-2003. 때로 목록만으로도 살아 있는 지식역사와 조우하고 묵직한 제목과 제목 사이에서 시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오직 책이름만이 그러하다. 목록의 주인은 환갑을 넘긴 출판사와 그 출판인 한만년이다. 책도시에서 그 둘을 하나로 기리는 제사이자 잔치이자 전시회 이름은 출판인 한만년과 일조각(열화당책박물관, 10·2~12·26)이다.
책이란 기록과 기억의 저장 장치다. 이를 다시 기록과 기억하는 일로 형상화해낸 이기웅(열화당 대표)은 제 몫을 오직 한 글자로 줄여 말했다. 염(殮). 기록과 기억을 추스르고 다듬어내는 염습이라는 뜻이렷다. 가히 지상에서 가장 짧은 제문이다. 반세기 동안 2000여 책을 세상에 내놓은 한 출판인의 일생에 대한 후학의 옷자락 빈틈없이 가지런한 말이다. 때로 한 글자만으로도 문자향은 족히 깊다. 경포호를 건너가 만나던 배다리집 선교장 선비가 이렇듯 허사도 후렴도 없이 단정한 데는 내력이 있다.
한 물결로 지은 활자의 집 일조각은 한국 출판에서 돛대 같은 구실을 하며 시대와 사람과 문자와 지식 사이를 예순 해 넘게 헤쳐왔다. 우선 그 출판사의 첫 책이 한만년의 장인이요, 소설가이자 제헌헌법을 기초한 헌법학자 유진오의 <(신고)헌법해의>다. 이 책은 애초 명세당에서 찍었던 것인데 한만년이 출판을 배운 고종사촌이 운영하던 탐구당으로 옮겨갔다가 세 번째 펴내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장인을 책으로 모셔온 셈이다.
암스테르담 프리젠 운하를 따라가면 합스부르크 왕관을 쓰고 있는 서교회 바로 건너편에 안네 프랑크네 집이 있다. 그 꼭대기 다락방에서 보이는 교회 시계탑이 십오 분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안네는 친구 같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 문장을 한국어로 처음 들려준 건 한만년의 아내 유효숙의 번역으로 나온 <별은 창 너머(안네의 일기)>(1954)였다. 눈매 깊은 안네의 단발머리 사진이 표지에 박힌 초간본(영어와 일어 중역)은 전시장 서가에서 뽑아볼 수 있다. 일조각 첫 책은 장인이 썼고 두 번째는 아내가 번역한 책이다. 한만년은 처가에 글 빚을 졌고 실로 이는 드문 축복이었다.
일조각이 이뤄낸 가장 굵은 공적으로 꼽아야 하는 건 한국사를 식민사학에서 일어서게 한 줄기찬 기획과 성과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을 필두로 몇 권만 수평으로 펼쳐 봐도 목록이 그대로 한국사 연구가 된다. 한국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책이 1500여 종에 이를 지경이니 그 출판사집 아들(한홍구, 현대사학자)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강의 대부분을 자기 집에서 나온 책으로 배웠다는 말은 한낱 허투가 아니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라는 양대 잡지 또한 초기에 이 출판사 품에서 발행되었다. 이 일련의 활동은 일조각이 한국 지성사의 저수지요, 거대한 지적 물결이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일조각 출판사 사옥 옥상에서 두 출판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임정 법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귀국해 동아일보 창간기자였고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한기악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둘째아들 한만년은 집 없이 떠돌면서도 먼저 활자로 된 집을 짓고 이윽고 아버지 아호를 새겨 월봉저작상을 제정했다. 첫 수상작은 <서간도시종기>였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쓴 이 책은 그 여섯 형제의 독립운동에 대해 한땀 한땀 뜬 기록문학이다. 한국출판금고 설립, 출판업 면세 혜택, 저작자 원고료와 인세에서 소득세 면제 등도 출판인 한만년의 생각과 손을 거쳐갔다. 소격동 가는 길 사간동 벽돌집 출판문화회관은 그를 중심으로 쌓아올린 책과 지성의 오랜 토론장이다.
말을 심고 문자를 일으키는 일이 출판이다. 인간사유의 통합적 집약체인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요, 지성의 뜨락이자 광야요, 옆집 세간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골목이자 끝없는 대로이고, 무엇보다 집요한 향연이다. 이를 재구성하는 기억의 역사를 전시로 만나는 일은 책도시(파주북소리 2014)가 주는 가을 선물이다.
서해성 | 소설가·한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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