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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의 영향력이 전방위적이다. 파죽지세로 검찰·문화예술·대학·종교계를 거쳐 급기야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여성들의 변화에의 열망은 거세다. “말하고! 소리치고! 바꾸자!” 지난 4일 광화문광장은 3·8세계여성의날 행사에 참석한 여성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미투와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하겠다) 팻말을 손에 든 여성들은 “연결하고 연대해 더욱 강해지고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외쳤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쏟아진 여성들의 응원과 지지는 서 검사를 지켜냈고 또 다른 미투 동참자들이 증언대에 서는 든든한 디딤돌이 됐다.

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8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Me Too #With You'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미투 운동은 곧 위드유 운동이다. 말 그대로 ‘나도(MeToo)’는 누군가와 동조해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윤택이나 안희정 지사 등을 고발했던 미투 동참자들은 “후배를 위해 나섰다”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올린 댓글과 증언 때문에 자신이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고, 또한 자신이 나서면 침묵하던 피해자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상호 충돌하는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조직 내에서 위드유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조직은 통상 성폭력이 발생하면 덮는 데 급급해왔다. 훼손된 피해자 여성의 존엄성보다 기관 전체의 위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건을 처리한다 해도 상황은 피해자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간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흘리며 주변 지지자들을 모아 광범위한 동맹을 결성한다. 남성이 우위에 있기 마련인 성별권력체계와 비민주적 위계문화, 거기에 “남 일에 나서지 말라”는 ‘쿨’한 생존방식이 더해지면서 보통은 약자의 어려움과 고통에 슬쩍 눈을 감는다. 각종 인맥과 권력으로 엮인 독점적 카르텔의 수혜자는 어이없게도 상급자 남성이기 십상이다.

안 지사의 성폭행을 고발했던 수행비서는 “여러 번 신호를 보냈고 눈치챈 한 선배에게 얘기를 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인터뷰 말미에서 그녀는 “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방송이라고 생각”해 출연을 결심했고, “국민들이 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거대한 공공기관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눈물겨운 호소에 가슴 한편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장관과 동료 검사들이 뻔히 지켜보는 데서 성추행을 당한 서 검사도 경우는 마찬가지다. 뿐이랴. 경남경찰청 소속의 한 여성경찰은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도왔다가 “사건을 조작했다”며 ‘꽃뱀’ 취급을 받고 감찰까지 받는 고초를 겪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는 “인간사는 거대한 채무관계”라고 했다. 주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란 뜻일 게다. 인권의 가치에는 자유, 평등과 함께 위드유의 다른 이름인 연대가 포함된다.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공동체 내에서 연대라는 상호의존적이며 호혜적인 동력을 통해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드유는 사소하고 작은 실천에서 출발할 수 있다. 안 지사의 수행비서가 말했듯이 권력관계의 하층에 놓여있는 피해자는 ‘NO’라고 말하기 힘들다. 피해자 옆 주변인의 말 한마디나 기민한 대처가 성희롱·성폭력을 예방하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먼저 일과 후 회식이나 술자리 관행을 재고하자. 바람직하지 않은 언행이 농담의 이름으로 나오려 하면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라며 탁 끊어주자. 잘못된 관행에는 “더 이상은 아니야”라는 경고음을 보내자. 성차별적 농담이나 음담패설이 오갈 때면 함께 가담하거나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 인권과 젠더 감수성을 갖춘 상급자의 말이라면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 성폭력이 발생한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일 중요한 일은 피해자에게 공감하며 정서적으로 지지해 주는 일이다. 자책감을 부추길 수 있는 괜한 말은 금물이다. “설마, 그럴 리가”와 같이 사건을 예단하는 표현은 삼갈 일이다.

위드유의 실천은 각 개인의 성향과 고통에의 감수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성폭력이라는 범죄를 겪고 공포와 불안에 떠는 피해자가 개별적인 동료의 공감능력과 도움에만 의존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 빈 구멍을 메우는 일은 국가의 몫이다. 피해자가 더 이상 꽃뱀으로 몰리지 않고 2차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도 상처를 치유받고, 가해자가 범죄에 걸맞은 처벌과 징계를 받도록 하는 일은 국가의 의무이다. 이제 국가의 응답만이 남았다. 그 응답은 추상적 구호나 지지가 아니라 촘촘한 정책과 법제로 채워져야 한다. 어떤 종류의 성폭력에 대해서도 절대 불관용의 원칙을 이 기회에 확고히 뿌리내리도록 미투와 위드유, 민관이 협력해야 한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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