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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장관회의 분임토론에서는 ‘의료인력의 역할 개혁’이 화두가 되었다. 주목을 끈 대목은 ‘직능 이기주의’라고도 번역되는 ‘사일로(silo)’ 현상에 대한 언급이었다.

‘사일로’란 무엇인가? 농장에서 방대한 양의 목초나 곡물 등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굴뚝 모양의 거대한 원통형 탑 또는 구덩이를 말한다.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이 구조물에는 창문도 없다. 그래서 마치 사일로의 담을 쌓은 듯 조직 내 다른 곳과 단절되어 자기 부서의 내부 이익만을 추구하는 칸막이 문화 또는 부서 이기주의를 비유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보건의료 의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에서 의료계 내부의 직능 간 사일로 현상이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로 논의된 사실은 적잖이 놀랍다.

현대의료는 전문성을 이유로 질병마다 또는 기능마다 의료인들의 역할을 분리하여 왔다. 한데 날이 갈수록 서로의 담장이 높아지고 견고해지면서 전체 작업의 흐름은 오히려 분절되고 경직되며 각자의 역할 속에 좁게 매몰되어가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만연화 등 인구 구조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긴밀한 협업이 절실해진 상황에서 사일로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의료서비스의 유연성과 협력관계를 회복하려면 직능 간 사일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앞으로 필히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게 이날 토론의 요지다.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직능 간 업권 분쟁은 별반 새롭지 않다. 의약분업 때 처방조제권을 놓고 의사와 약사가 대결하였고, 의료기기 사용을 두고 양방과 한방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며, 인턴제, PA(전담)간호사, 입원전담전문의 등 현안들이 산재해있다. 유관 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합의가 미뤄지고 정부도 중간에서 눈치를 보느라 어느 것도 결정을 못한 채 수년째 답보상태다.

일자리 불균형의 문제 또한 오래된 이슈 중 하나다. 의사도 그렇지만 최근 간호사의 경우는 더욱 극명하다. 필요한 간호인력을 못 구해서 애를 태우는 지방병원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일자리가 없다고 온 나라가 시끄러운 상황에서 일자리가 있는데도 사람을 못 구해 안달하는 곳이 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현상인가. 마치 한쪽에서는 배불러 난리인데 다른 한쪽에선 배곯아 난리인 것과 같다.

이런 불균형 현상이 ‘사일로’ 현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일까? 정책의 결정 과정에는 권리와 영역을 확보하려는 관련 단체들의 목소리가 경쟁적으로 작동한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경우 업무의 전문성을 살린다는 명목하에 그동안 간병인의 업무로 맡겨져온 환자의 신체수발 업무가 갑자기 간호사·간호조무사 직능으로 이전되었다. 이로 인해 일시에 많은 수의 채용수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의료계뿐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직능 사일로의 존재는 여러 뉴스를 통해 확인된다. 최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430여건의 청원이 제출되었는데 그중 게시판 베스트를 달리고 있는 것이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반대청원’이라고 한다. 한데 특이하게도, 교육 관련 문제들에 사사건건 반대 목소리를 내던 교총과 전교조가 이번엔 이례적으로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매우 놀랍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다. 정쟁으로 싸우는 중에도 의원들이 자신의 급여나 복지, 권한 등 직능의 이익이 걸린 이슈가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체없이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직능 사일로가 작동한 게 아닐까?

한편 지난 24일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법무부의 탈검찰화를 확고하고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며 즉각적 직제개편을 권고했다. 무슨 무슨 직위를 ‘검사로 보한다’에서 ‘검사 또는 일반직 공무원으로’ 또는 ‘외부인사로’ 개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법조계에도 유관 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섬세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다만 이 뉴스에서 눈길이 머문 대목은 개혁위 권고안의 서두였다. “법무부가 본연의 기능을 되찾고 국민 신뢰를 받는 전문적인 법치 행정을 구현하기 위해….”

어찌 보면 직능단체가 단합하여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이해와 이슈에 지나치게 몰입하다가 자칫 업의 본질, 직능 본연의 목적을 잃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목욕통의 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지 않기를.

의료계의 본질은 국민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고, 교육계의 본질은 학생을 올바르게 양성하는 것이며, 법조계의 본질은 정의롭게 판결하고 집행하는 것이고, 정치계의 본질은 민의를 반영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숙제다. 직능이 함께 어우러져 집단지성을 발휘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새로운 질서가 진행 중이다. “모두들 힘냅시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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