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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종영한 지 10년도 지난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The West Wing)>은 흥행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정치의 내부 디테일을 시청자들의 안방에 성공적으로 가지고 왔고, 여전히 미국 역대 최고 드라마 중 하나로 꼽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광적인 애청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 드라마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미국 정치의 정책결정 과정이나 당파적 논쟁구도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데 이보다 좋은 텍스트는 없다고 생각하며 가끔씩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비현실적인 드라마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드라마 속 바틀렛 대통령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경력이 있는 진보적 경제학자 출신이며, 누구보다도 정책적 디테일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지적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또한 지적 측면 못지않게 대통령은 더없이 따스한 인격자이며 비현실적일 정도로 국민의 삶을 염려하는 철저한 공적 마인드로 무장되어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방영 당시에도 너무 비현실적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드라마를 히어로물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히어로물과 비교해도 <웨스트윙>의 보좌진 또한 뒤처지지 않는다. 젊고,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유능한 그리고 따스하고 선한 의지를 지닌 보좌진은 밤잠과 개인사를 희생하며 대통령과 국민과 세계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한다. 대통령과 보좌진의 소통은 상시적이고 진지하면서도 항상 유쾌하다. 만약 나의 삶과 공동체의 운명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들에게 언제든지 맡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정치지도자이건 그런 사랑과 믿음을 받는 것은 평생의 꿈이 아닐 수 없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 또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청와대 경내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던 보좌진의 사진에서 <웨스트윙>이 겹쳐 보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웨스트윙>이 일반 히어로물이 아닌 이유는 도처에 처한 장애물들이 때로는 절벽처럼 극복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야당은 이유 없이 반대하고, 여당 의원들은 움직이지 않으며, 제도는 비효율적이고, 각국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곳에서 대통령과 보좌진의 선의와 열정은 거의 무의미하다. 아마도 작가가 비현실적으로 선량하고 유능한 대통령과 보좌진을 설정한 이유는, 백악관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들로 구성되어도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존재하며, 제도와, 환경과,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지뢰처럼 박혀있는 우연적 사건들 속에서, 말과 설득은 많은 경우 무기력하며 이상은 왜 희석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가장 고결한 내적 가치가 현실의 질서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찌 비극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모술수에 능한 악당이 백악관에 기거했다면 차라리 희극적이기나 했을 것이다.

대통령제하에서는 그것이 드라마이건, 현실 정치이건 모든 것이 캐릭터에 대한 탐구로 치닫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대통령 선거가 점차 미디어를 통한 인물 중심의 선거로 수렴되는 것처럼 대통령은 현대의 군주이며 대중의 선망과 눈길을 이끄는 결절점이기 때문이다. 정책이 좋아서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좋아해서 정책에 설득되는 곳에서 중요한 것은 비전이 아니라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소통능력’과 ‘선한 품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시민들이 가장 목말랐던 것도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의 압도적인 지지율은 어쩌면 이러한 슈퍼히어로에 대한 목마름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적폐’가 ‘악’의 다른 이름이라면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그 ‘악’을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쳐부숴 줄 슈퍼히어로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고 공동체와 정치는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정치는 백악관이나 청와대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내일 전투에서의 한 걸음 전진을 위해 오늘 한 명의 포로를 희생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음을, 한꺼번에 모든 악을 시원하게 일소하는 것은 대개 불가능하고 진흙펄을 걷듯 한 번에 한 가지씩 진심을 바쳐 해결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음을 <웨스트윙>은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틀렛 대통령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다음 할 일은 뭔가?(What’s next?)”였다. 아마도 몸은 느려도 말과 마음은 전망과 비전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낙관적이고 유쾌하게 길을 걷는다면 어떤 곳에 종국에는 도달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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