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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후 복지국가 건설과 경제민주화는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등극했다. 2012년 대선에선 박근혜 후보가 그 시대정신의 구현자가 되겠다는 공언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 후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정치권의 주요 의제 리스트에서 사실상 삭제됐다. 물론 정치권의 책임 방기가 시대정신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여전히, 아니 과거보다 더 절실히 그 시대정신을 연호하고 있다.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다시금 핵심 선거의제로 떠오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거들이 끝난 이후엔 과연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지금의 정치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때에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중략)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국가가 시장조정권을 발동하여 경제민주화를 달성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현실적으론 사문화된 것이라 봐야 한다. 국가의 시장조정권이란 결국 집권정당(들)이 행사하는 것인데, 한국에는 그럴만한 유력 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맞물려 있는 현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지역 중심의 거대 양당제를 온존케 하고 있다. 진보정당들은 집권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양대 정당들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시장조정 의지를 키울 필요가 별로 없다. 지역 기반을 잘 관리하거나 대중적 인기가 상당한 인물을 다수 확보하고 있으면 선거정치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와 그 최종 결과물인 복지국가를 이루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약자 계층의 선호와 이익을 제대로 대표하는 이념 및 정책 중심 정당들이 유력 정당으로 부상하여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상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적 대표성’이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두루 보장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물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는 선거제도, 그리고 그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이 급선무이다. 그래야 다종다양한 여러 계층과 집단들의 요구를 정치과정에 제대로 투입할 수 있는 다수의 유력 정당들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 내부에서의 제도개혁 논의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헌재의 위헌판결에 힘입어 새로운 선거제도가 도입될 수 있으리라는 시민사회의 기대와는 달리 양대 정당은 작금의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개혁 작업은 선거구 재획정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는 듯하다. 설령 선거제도를 바꾸게 될지라도 고작해야 중대선거구제의 채택일 듯싶다. 그러나 그 제도는 정당투표가 아닌 인물투표를 부추기며 금권정치, 계파정치, 사익제공정치 등의 만연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일 뿐이다. 시대정신의 구현에 필요한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활성화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당 집권을 위한 모임' 주최로 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치개혁과 정당혁신을 위한 집담회'가 열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공천제도 개혁 논의도 문제이다. 양대 정당이 ‘오픈 프라이머리’ 혹은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에 합의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 제도 역시 정당정치 활성화엔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일반국민이 진보파와 보수파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들을 모두 결정한다면, 각 정당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소속 정당만 다를 뿐 총선에 나갈 후보들은 모두 소위 ‘국민후보’일 뿐이다. 진보파 정당의 후보들도 약자 계층의 대표성을 갖출 필요가 없다. 그저 국민적 인기가 있으면 그만이다.

이같이 공천제도와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모두 정당정치보다는 인물정치를 강화하는 쪽으로 진행돼 가고 있다. 게다가 개헌론까지 일고 있지 않은가. 정당정치가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구조만을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전환한다면 정부는 정당이 아닌 인물 간 타협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러한 ‘과두체제’에서 시대정신의 구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일련의 정치제도 개혁 과정에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가 절실한 시점이다.


최태욱 |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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