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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탁월한 재능 가운데 하나는 불리한 사안이 터질 때마다 판을 ‘이전투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범법자와 고발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사안의 본질은 흐려지고 곁가지만 무성해진다. 비리의 몸통은 온존하고 깃털만 치명상을 입는다. 사건이 복잡해질수록 대중은 시선을 딴 데로 돌리게 된다. 정치에 대한 혐오, 공동체를 향한 불신은 더욱 깊어진다.

청와대가 다시 회심의 카드를 꺼내든 모양이다.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 관련 문건을 작성·유출한 배후로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주도하고 박지만 EG 회장 측근 등이 참여한 ‘7인 모임’을 지목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문건 유출을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한 뒤 특별감찰을 해 이 같은 결론을 내고 검찰에 관련 자료를 넘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조 전 비서관이 모임의 실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어 또 다른 ‘진실게임’으로 비화하는 형국이다.

청와대 감찰 결과가 사실이라면 마땅히 수사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수사를 하더라도 선후는 가려야 하고, 형평성도 지켜야 한다. 이번 사건의 초점은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이 실재했는지 여부다. 이 부분을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서 작성·유출의 배후부터 따진다면 옳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정윤회씨 소환 조사를 두고 뒷말이 많은 터다. 검찰은 소환에 앞서 정씨 자택이나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수색도 하지 않았다. 출석 과정에서 보안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직원 전용 출입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조사 시간 동안 정씨 사건 담당 부서가 있는 2개 층에 대해선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이러니 정윤회씨가 유감 표명 한마디 없이 “엄청난 불장난” 운운하는 것 아닌가.

국정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씨가 검찰 출석 16시간이 지난 11일 새벽 2시경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 청사를 빠져나오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박 대통령은 ‘정윤회 문건’ 내용을 “루머”(12월1일), “찌라시”(7일)라고 비난해 ‘수사 가이드라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청와대가 특별감찰 결과까지 검찰에 넘기면서 ‘세 번째 가이드라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검찰이 행정부 산하임을 감안한다 해도, 대통령 발언과 청와대의 행태는 도를 넘은 수사권 침해라고 본다. 검찰청법에 따르면 검사는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다. 검찰은 이 점을 깊이 새겨 국민 앞에 모든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섣불리 ‘불장난’으로 규정하고 ‘불장난에 춤춘 사람’이나 쫓아다닌다면 검찰은 존립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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