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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최근 병원의 초기 연혁을 정리하며 이런저런 오래된 흑백사진과 자료들을 발굴하게 되었다. 매년 연보를 만들 때마다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반복하던 첫 몇 줄의 의미가 조금씩 생명력을 갖고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 우리 병원은 이렇게 시작되었구나.’ 기록을 확인해나가는 작업은 더디지만 즐거웠다. 단절되고 무관하게만 느껴지던 먼 시간이 생생히 곁으로 다가와 우리가 누구인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백조였음을 깨닫게 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시민병원’이라는 잊혀진 이름의 재발견이었다. 나이 드신 분 중에는 을지로에 있던 시민병원을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다. 이 이름 참 정답고 반갑다. 평소 낯선 이에게 병원을 소개할 때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게 나온다. “동부병원… 동쪽에 있나요? 그럼 서부, 남부, 북부도 있겠네요?” “네, 뭐 비슷합니다.” 그때마다 머쓱하다. 누가 이름을 이렇게 성의 없이, 개성 없이 붙였을꼬. 하지만 ‘시민병원’이라는 이름은 다르다. ‘시민이 주인인 공공병원’이라는 우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너무도 선명하게 가감 없이 드러내주지 않는가.

병원의 기원은 1929년 경성부민의 진료를 위해 세워진 ‘경성부영진료소’에서 시작한다. 1934년 신축하며 ‘부민병원’이 되었다. 경성의 중심가 황금정통(지금의 을지로) 훈련원 터에 새로 지어진 신식 콘크리트 건물의 낙성식 장면이 떠오른다. 훈련원은 조선시대 무술훈련과 무과시험을 관장하던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을 보다 말에서 떨어졌지만 다리를 동여매고 다시 올라타 급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내려오는 바로 그곳이다. 무술을 연마하던 곳에서 의술을 펼치는 곳으로 전환된 것은 맥락상 칼을 사용하여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바가 있어 오묘한 땅의 기운이 작동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부가 서울시로 바뀌며 병원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시민병원’으로 따라 바뀌었다. 1957년 터전을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옮기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이는 당시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주도로 한국 정부와 스칸디나비아 3국 사이에 맺어진 국립의료원 설립운영에 관한 3자 협정(tripartite agreement)에 따라 신설되는 국립의료원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 까닭이다. 이후 시민병원은 ‘동부병원’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격변의 근대를 살아온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고달픈 흔적이 병원 연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몇 해 전부터 이 유서 깊은 곳에 다시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국립의료원 현대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초구 원지동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였고 병원을 신축 이전하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을지로 땅은?

보도에 따르면 을지로 부지는 막대한 이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각을 결정하고서 개발자를 찾고 있고 그곳은 공공병원으로 사용되던 기존의 용도와는 다른 용도의 개발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쉽다! 이 땅은 국립의료원 이전부터 시민병원과 부민병원, 면면히 지역 서민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곳이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 의료급여 대상자, 노숙인, 장애인 등 의료취약 계층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될 든든한 버팀목이자 비빌 언덕이 돼 왔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품은 땅을 팔아 이전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런데 과정 중에 근방의 도심 일대 의료공백을 걱정하는 지역주민들이 반발하자 당국은 이를 고심하게 되었고 다소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매각조건에 전체 부지 8341평 중 8.6%에 해당하는 717평 귀퉁이 땅에 소규모 공공병원을 짓는 단서를 붙이게 된다. 문제는 추산된 이전비용을 맞추려고 하다보니 내놓은 공공병원 부지의 크기가 턱없이 작다는 것이다. 굳이 대형병원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역주민의 필수의료는 물론 기간시설이 밀집되어 있고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지역 특성상 혹시나 있을 사건사고나 재난에 긴급 대처하고, 취약계층을 돌보는 공공의료를 수행할 종합병원의 역할을 담아내기 위해선 적정한 규모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대로라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면피용이거나 정체불명의 애매한 멀티클리닉 수준의 요양병원밖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

60여년 만에 다시 변화를 맞게 될 이 유서 깊은 보건의료 역사적 땅에 그 필요와 의미가 제대로 담긴 ‘시민병원’이 다시 들어서게 되기를 바란다. 시민병원인 만큼 그 내용을 더더욱 시민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구체적 공론화 과정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어쩔 수 없지 않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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