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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수능 연기…. 지금 실화야, 실화냐고? 나 어떡해, 다리에 힘이 확 풀리는 것 같아!”

지난 15일 포항 지진으로 수능 연기가 발표된 날 고3 수험생인 아이는 아연실색했다. 가방을 싸놓고 나름 마인드컨트롤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든 후 퇴근한 아빠가 소식을 전하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2018 수능, 포항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23일 시행’이란 뉴스 속보를 몇차례나 검색해 보고서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언뜻 1주일 연기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사자들의 당혹감은 무척 컸다. 숨도 멈출 만큼 잔뜩 긴장해 100m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들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포항 지진으로 2018 대학수학능력평가가 일주일 연기됐다. 17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공부는 물론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별별 신경을 다 써가며 준비한 날이 아닌가. 전국 59만3527명의 수험생들은 이날 모두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수험생 60만명가량은 물론이고 이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험생에 딸린 가족이 4명이라면 240만명, 가까운 친·인척 10명만 손꼽아봐도 600만명이 그간 함께 마음 졸여왔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사상 24년 만에 첫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은 지난 15일 포항에서 규모 5.4의 강진이 발생한 때문이다. 지진으로 건물파손과 균열 등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했고 피해자가 속출했다. 천재지변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사람들의 공포를 생각하면 합당한 조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수능 연기로 여기저기서 혼란이 빚어졌다. 수능 전날 기숙사 학원이나 독서실을 나서며 그동안 공부해온 손때 묻은 교재를 버린 수험생들은 그야말로 ‘멘붕’이 됐다. 한데 뒤섞인 교재 더미에서 자신의 것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TV뉴스에 중계돼 안타까움을 샀다. 수능 출제위원으로 들어간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자녀들의 사연, 자식의 수능이 끝난 후 수술을 하겠다고 스케줄을 미룬 암투병 학부모, 소음이 걱정돼 모든 공사를 수능 이후로 잡은 독서실 옆 가게 주인까지….

‘웃픈’ 얘기도 있다. 우리집 고3 아이의 친구네는 온가족이 수능성공 48시간 단식을 했는데 70대 할머니가 허기에 지쳐 일찍 잠이 들고 다음날에야 연기 소식을 듣고선 허탈해하셨다고 한다. 수능 전날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선 고3 수험생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마련됐는데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며 선생님을 붙잡고 오열하며 인사했던 아이들은 “다음날 학교에서 또 어떻게 얼굴을 보냐”며 민망해했다. 예비 고3, 고2에 맞춰 수업일정을 잡은 학원, 수능에 맞춰 영화 개봉과 공연 개막일을 잡고, 온갖 마케팅을 펼쳤던 기업들까지 변경이 불가피하게 됐다.

막상 수능이 연기되고 나니 ‘수능 나비효과’는 생각 이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촘촘하게 연결된 존재였던가. 급기야 정부는 ‘수능 연기 고충처리센터’까지 마련했다. 수능 연기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수험생과 학부모 및 국민 고충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수능 연기를 둘러싼 잡음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수능 연기 반대 청원이 쇄도했다. 이틈을 타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사람이 먼저’라는 현 정부의 기조를 정치적 인기몰이로 치부하는 비난도 있다. 포항 지역의 수험생들 가운데는 체육관에 머물고 있는 가족과 떨어져 위험이 남아 있는 집에서 혼자 공부할 만큼 절박한 아이들도 있지만 수능 연기의 원인 제공자로 원망을 들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도 겪고 있다.

초유의 수능 연기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학교 체육관에서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한 고3 수험생 엄마는 TV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게 불안하고 힘들지만 우리 사회가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요. ….” 대다수를 위한 논리였다면 안전불감증의 비난이 일었을망정 수능은 연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능이 갖는 상징성은 단순한 시험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욕망이 응축된 절대불가역의,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수능 아닌가. 그런데 그 수능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절대 다수, 기득권의 편의와 힘에 좌지우지되고 몰아붙여진 사회에서 오랜 기간 살아온 우리에게 ‘수능 연기’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안전을 위해, 소수를 위해, 불공정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 모두가 멈출 수 있다, 잠시 쉴 수도 있다, 가던 길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 이제는 그럴 때가 된 것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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