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스페인 토마토 축제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람들이 태산처럼 쌓아 놓은 토마토를 짱돌 던지듯 투척하고, 발로 짓이기면서 노는 축제인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제 중 하나란다. 아버지 연배의 어르신들이 보면 기함할 장면이다. 먹는 거로 장난치면 천벌 받는다는 믿음으로 사신 분들이니 말이다. 나도 한때 천벌 받을 짓 많이 저질렀다. 밭가에 던져 버린 토마토를 장화 신고 짓이겨 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큰일 난다”며 말리시곤 했다.

‘도마도집’ 딸이었던 나는 대학생 때 정통으로 IMF를 때려 맞았다. 형편이 쪼들리면 제일 먼저 지갑을 닫아버리는 것이 과일 구매다. 한국이야 토마토를 과일로 먹다 보니 그 소비가 함께 줄어든다. 게다가 쌀값은 형편없고 수입개방은 대대적으로 벌어져 정부가 특작으로 방울토마토 권업을 많이 했었다. 결국 방울토마토와 그냥 토마토 모두 동반 추락. 최상품 토마토가 아닌 이상 트럭장수는 가져가지도 않고 가락동이나 구리, 청량리 농수산물 시장을 빙빙 돌아도 실어간 토마토를 하차조차 하지 못했다. 빨개지는 토마토는 유통이 어려워 상품성이 없다. ‘권투장갑’이라 불리던 등급외품 토마토를 밭가에 던져놓으면 그걸 주워가는 치들이 있었다. 몇개 정도야 주워서 간식으로 먹는 건 참겠지만 작정하고 주워가는 사람들이 너무 얄미워 아예 당신도 못 가져가고 우리 집도 내지 못하게 발로 짓이겨 버리곤 했다.

겨울부터 온실을 따로 만들어 토마토 모종을 직접 기르고 애면글면 돌본 토마토로 인건비 보전은 언감생심. 종당에는 박스값과 상하차비, 작목반 회비도 건지질 못할 판이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모종 기르는 수완이 있어서 모종값은 따로 나가지 않았으니 그거 하나 다행이었달까. 결국 갈아엎기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작물은 자랄 때는 무섭게 자라기 때문에 농가에 부담으로 오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다음 작물을 빨리 심어 벌충해야 하니 말이다.

올해 상반기, 가뭄으로 배추가 귀했다. 배춧값이 괜찮아 좀 많이 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받쳐주면서 김장 배추 폭락장이 돼버렸다. 배추 주산지에서 출하량 조절을 위해 트랙터로 배추밭을 갈아엎는 것으로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배추를 뽑을 수도 없고 밭떼기로 넘기지 못한 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다. 포기당 200원입네, 300원입네 하는 마당에 사람 사서 수확을 한다는 것은 장고 끝에 악수다. 그래서 트랙터로 갈아엎는 배추밭이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에 차라리 기부를 하지 음식 귀한 줄 모른다거나, 보상금 노리고 저렇게 갈아엎는다는 식의 물색없는 말들이 줄줄이 달린다. 농업은 생명을 살리는 일만이 아니다. 살리는 만큼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진드기도 잡고 미국선녀벌레도 잡고, 탄저도 잡아야 한다. 농민들 몸과 마음을 모두 죽여가며 하는 일이 농사다. 돈을 벌겠다가 아니라 손해를 덜 보는 궁여지책으로 삼는 것이 갈아엎기다.

그해 부모님은 토마토를 엎어버리고 겨울 오면 엽채값이 오르려니 하면서 쌈채소를 심었다. 하지만 IMF로 사람들이 삼겹살마저 사먹지 않으니 쌈채소는 갈 길을 잃었고 연거푸 갈아엎고 말았다. 트랙터가 없었던 우리 집은 트랙터 대여비와 공임까지 보태서 말이다. 20년 전 토마토 함부로 발로 차던 시절의 이야기다. 피멍자국으로 남은 토마토.

철 지난 지 한참인데 거둘 엄두도 못 낸 푸른 배추는 함부로 걷어차인 멍자국 같아 바라보자니 차마 아프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