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백학순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요새 ‘우리 사회에서 패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재도전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부쩍 많아졌다. 그 동안 악화될 대로 악화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1%의 부자 대 99%의 나머지’로 나눠 비판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다 보니 대선정국에서 자연히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리라.
이번 대선정국에서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을 맨 먼저 강조하고 나온 사람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출판한 자신의 여러 저서들, 지난 5월 말 부산대 강연, 7월 중순에 출판된 <안철수의 생각>, 또 7월 하순에 출연한 SBS 방송의 <힐링캠프> 등에서 재도전 기회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패자 구하기’는 안철수의 등록상표가 됐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도 최근 ‘패자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 9월9일에 경남 김해 상동구장을 방문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기존 프로구단에 입단하지 못했거나 구단에서 방출된 선수 위주로 꾸려진 ‘독립구단’인 고양 원더스와 롯데 자이언츠 2군팀 감독 등 관계자와 선수들을 만났다. 그리고 “한 번 실패를 겪었거나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이나 부상을 당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게 어려워졌을 때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갖도록 해 잠재력을 키우고 성공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하는 것이 제가 정치를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젠다”라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철수의 경우, 패자 구하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사회가 모든 이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주지 않아 패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기득권이 대물림되는 사회구조를 갖고 있으며,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믿음, 말하자면 ‘승리 이데올로기’가 지배문화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박근혜가 상동구장을 방문해 패자 부활에 대해 한 말을 보면, 그것이 자신의 중요 정치 의제라고 말했을 뿐, 패자 부활이 어떤 이유로 우리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지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패자에 대한 이해가 ‘패자 개개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우연성’, ‘우발성’, 그리고 ‘불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근혜와 안철수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야구복 입고 야구공에 사인하는 박근혜 (출처; 경향DB)
패자 구하기에 대한 박근혜의 처방도 안철수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안철수의 처방은 패자를 만들어내는 불공평한 사회구조, 승리 이데올로기와 같은 지배 관념과 문화를 개혁함으로써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박근혜의 처방은 패자 개개인으로 하여금 재기회를 갖도록 해서 패자 개개인의 잠재력을 키우고 성공하도록 하겠다는 것으로써 사회전체 차원에서의 정책적, 사회적 처방은 전혀 강조되고 있지 않다.
결국 박근혜의 생각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사회전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 보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기득권의 시각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흔히 부자들이 즐겨 말하는 ‘잘살고 못 살고는 개인의 팔자소관’이라는 세계관이다. 이들에게 성공과 실패는 모두 개개인의 능력이요 책임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국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한다면, 정치의 보호가 필요한 국민을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라.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금 “고름이 가득 찬” 시대를 살고 있다. 자식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희망 하나로 살아온 서민들은 소위 ‘1% 대 99%’로 풍자되는 이 참담한 부의 양극화 속에서 거의 대부분 패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 서민들은 패자를 양산해내는 이 거대하고 음습한 사회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 내겠다’는 후보를 찾기 위해 입을 다문 채 폭풍 전야처럼 정치판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이 필자의 관찰이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앞에 놓인 과제 (0) | 2012.09.16 |
---|---|
[사설]민주당 혁신, 야권의 재구성을 위한 토대다 (0) | 2012.09.14 |
[사설]‘안철수 불법사찰’ 의혹 어물쩍 넘길 일 아니다 (0) | 2012.09.13 |
[사설]쌍용차 국회 청문회에 거는 기대 크다 (0) | 2012.09.13 |
[기자 칼럼]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 (0) | 2012.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