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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신 고(故) 박형규 목사님에 대한 긴급조치위반 등 재심사건에서 제가 무죄구형을 하며 과거사 반성을 했다가, 검찰 내부는 물론 언론에서도 크게 소란이 일었지요. 최초 무죄구형으로 보도되었지만, 과거사 반성은 최초일지 몰라도 재심사건 무죄구형은 그전에도 없지 않았으니 최초는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검찰이 더러 무죄구형을 하였거든요. 정권의 보수화에 발맞추어 검찰은 황당한 옛날 구형을 반복하거나 속칭 백지구형(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을 한 후, 무죄판결이 나면 무죄가 웬 말이냐며 기계적인 항소와 상고로 무죄 확정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악의적인 행태를 강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는 수뇌부에서 제 의지를 억지로 꺾지 않아 무죄구형을 할 수 있었는데, 12월 박근혜 후보 당선 후에는 실낱같던 샛길조차 완전히 끊겼습니다. 부득이 공판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무죄구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는 것은 검사의 의무니까요. 중징계를 받았지만,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제가 옳았다는 판결을 결국 받아냈습니다.

올해 초, 제주 4·3사건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검찰이 공소기각을 구형한 후 공소기각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신속하게 확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관련된 분들의 환한 웃음을 신문 너머로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소송이 상고기각으로 확정될 때까지, 법무부는 현재의 검사가 과거 법원의 유죄 판단을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검사가 무죄구형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제가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켰다고 비난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 검찰의 변화가 상전벽해와 같습니다. 놀랍기도,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불의했던 시절 제가 불의에 가담하지 않았음에 안도합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에는 4·3사건으로 학살당한 마을 주민들을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현기영 작가님의 시 ‘새로운 빛으로 되살아나소서’가 새겨져 있지요.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영구불망의 돌을 세운다.’ 그 시 구절 앞에 붙박이장처럼 한참을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권력은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의 입을 반세기가 넘도록 틀어막는 또 다른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정의의 대변자여야 할 검찰은 국가폭력의 잔인한 집행자가 되어 피해자들과 진실을 말하는 목격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교도소로, 사형장으로 보냈지요. 70여년간 고통받아온 억울한 원혼들, 그날의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족분들과 침묵을 강요당해온 목격자분들이 그 시 구절처럼 가해자들을, 검찰을 용서해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 판결이 확정된 후, 모 간부가 저를 불러 흐뭇한 표정으로 심경을 묻더군요. “저는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저에게 위법한 지시를 한 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과와 합당한 문책을 바랍니다”라고 답하니, 제가 가당치도 않은 과욕을 부린다는 듯 “징계취소해도 문제구먼”이라며 황당해했습니다. 그 간부가, 사과와 문책 없는 검찰이 참 원망스럽더군요.

그런 아픈 기억이 있는 터라, ‘용서하지만…’이란 그 구절이 ‘용서하려고 발버둥치지만’이라는 절규로 읽혀 가슴 먹먹했습니다. 색깔론이 아직도 횡행한 시대,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한 맺힌 사연들을 조심스레 꺼내며 비명을 참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보였거든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주변에 피눈물같이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이 너무도 처연했지요. 제주 4·3의 상징이 왜 동백꽃인지 그날 비로소 알았습니다.

4·3평화기념관에는 운주사 와불처럼 누워 있는 무서백비(無書白碑)가 있습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설명문 앞에 절로 숙연해지지요. 이름을 두고 이념과 진영 간의 논쟁이 끝이 없으니 아직 4·3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비이나, 사과와 화해를 통한 완전한 평화를 기다려온 원혼들의 오랜 피눈물로 적셔진 혈비지요. 사과는 가해자의 의무이고,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앞에 검찰을 포함한 가해자들과 악의 승리를 방관한 우리 사회의 진심 어린 반성문을 백비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백비에 얼룩진 피눈물을 가해자들의 눈물로 닦아 바로 세우는 날, 비로소 4·3이 끝날 테지요. 그날까지 가해자들은 피해자들과 역사로부터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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