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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롱패딩을 처음 본 것은 지지난 주 일요일이었다. 올해 첫 추위가 찾아왔을 때였다.

모처럼 진만도 정용도 아르바이트 비번이어서 오후 시간에 함께 대형 마트에 나갔다. 자취방 창문에 붙일 방풍 테이프도 사고, 스타킹도 사고, 라면도 한 박스 사놓을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월동 준비를 하러 간 셈이었다. 무더위에 헉헉거리며 연신 찬물을 끼얹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무슨 폐기된 삼각김밥처럼 가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난 말이야, 나중에 동남아 같은 곳에서 살면서 알바하고 싶어.”

“동남아?”

“거긴 그냥 다 똑같이 덥잖아. 추운 거보다야 그게 낫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거기라고 어디 다 똑같이 덥겠냐, 한 소리 하려다가 정용은 그만 두었다. 하긴 더운 게 낫지. 자취생이나 알바생에게나 여름은 고통이지만, 겨울은 그냥 공포다. 더워서 잠 못 이루는 것과 추위에 덜덜 떠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생활비 자체가 다르게 드는 일이니까.

쇼핑 카트에 방풍 테이프를 담고 라면도 담고, 다시 스타킹을 사려고 일층에 올라왔을 때였다.

“이거 봐. 이거 엄청 싸게 나왔는데.”

진만이 마트 일층 정중앙에 마련된 특판 코너에서 검은색 롱패딩을 보며 말했다. 정용이 슬쩍 그 옆으로 다가갔다. 작년에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끌던 롱패딩인데, 그 역시 폐기된 도시락처럼 특판 코너에 나와 있었다. 가격표를 힐끔 보니 38만 원이 찍혀 있었다.

“이게 원래 58만 원짜리거든.”

진만은 무슨 은밀한 거래를 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려니 하고 다시 양말 코너 쪽으로 가려 했는데, 진만이 겉옷을 벗고 롱패딩을 걸쳐 보았다.

“정말 간지나지 않니? 이건 뭐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사람이 달라 보이기는 했다. 무슨 애벌레 한 마리가 검은색 잉크를 뒤집어 쓴 채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이거 살까 봐.”

애벌레가 점점 간뎅이가 부어가는구나. 정용은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만은 거울 앞에서 도통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괜한 말 말고 빨리 스타킹이나 사러 가자.”

정용은 재촉했다. 그들은 작년 겨울부터 찬바람이 불면 꼭 팬티스타킹을 사 입었다. 그게 내복보다 더 따뜻했고 또 활동하기에도 좋았다. 자취방에서도 진만과 정용은 팬티스타킹만 입은 채 생활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 배달 온 중국집 배달원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던 적도 있었다. 하긴, 진만과 정용 또한 서로를 보고 가끔씩 놀라기도 했으니까.

“나 진짜 이거 사려고. 이거 사면 20만 원 버는 거잖아.”

20만 원을 버는 게 아니고 그 회사 재고떨이에 네 돈 38만 원을 보태주는 거겠지. 정용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또 한 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지 못할 테니까. 38만 원은커녕 3만 원도 없을 테니까.

정용은 진만을 거울 앞에 놔둔 채 양말 코너 쪽으로 카트를 밀고 갔다. 예상대로 진만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터덜터덜 정용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보풀이 많이 일고 남루한 코트를 걸친 채.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용은 커피색 팬티스타킹을 골랐다.

그렇게 끝난 거라고 생각한 진만의 롱패딩 타령은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난 정말 이해 못하겠는 게… 나랑 같이 알바하는 22살짜리 남자애가 하나 있거든. 근데 퇴근할 때 보니까 걔도 비싼 롱패딩을 입고 있는 거야. 그게 60만 원이 넘는다던데…. 버스 타면 나만 빼고 다 롱패딩이야. 나만 빼고 다 부자인가 봐.”

그러기에 아예 입어보질 말지. 그런 거 한 번 입어보면 나에게 있는 모든 옷들이 한순간 다 낡고 허름해 보이는 마법에 걸리는데. 그러니까 매장 점원들이 그렇게 한 번만 입어보라고 권하는 건데. 정용은 진만의 말을 계속 못 들은 척했다.

“나 그냥 할부로라도 살까 봐. 이젠 막 꿈에도 나와. 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왔는데, 할머니가 롱패딩을 이렇게 입고 나를 쳐다보시는데…”

아아, 그냥 사라, 사. 정용은 이불을 휙 뒤집어썼다. 이건 뭐 중2병 아이와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줄 것도 아닌데. 정용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속 롱패딩을 입은 할머니가 떠올라서 잠을 설쳤다. 나는 롱패딩이 싫다고요! 정용은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진만이 정말 롱패딩을 산 것은 지난주 토요일이었다. 알바 끝나고 돌아와 보니 진만이 자취방에서 롱패딩을 걸쳐 입은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대형 마트에서 봤던 38만 원짜리 그 롱패딩은 아니었다. 색깔은 똑같은 검은색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실해 보였고 또 얄팍해 보였다.

“내가 지난주에 봤던 그 롱패딩을 사려고 갔거든. 그런데 그게 마침 사이즈가 다 빠지고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오려고 했는데 마침 그 옆에서 이걸 17만 원에 팔고 있는 거야. 이거 봐봐. 지난주에 봤던  것과 디자인도 비슷하잖아? 이거 완전 득템한 거지, 득템.”

진만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용은 전혀 다른 짐작을 했다. 아마도 진만은 지난번에 봤던 그 롱패딩 앞에서 많이 망설였으리라. 다시 입어보고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계속 가격표만 생각났으리라. 그러다가 결국 다시 벗어놓고 돌아 나오다가 마음에 들진 않으나 훨씬 싼 저 롱패딩을 보았으리라. 정용은 그렇게 짐작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싸게 잘 샀네, 지나가듯 툭 그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진만은 팬티스타킹에 롱패딩을 걸친 채 ‘엄청 따뜻해. 이제 보일러 안 켜고 이거 입고 자면 되겠어’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그럼 나는? 정용은 묻고 싶었지만 그 말 역시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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