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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국회를 거쳐,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최종적으로 파면당했다. 이것은 언론방송이 묘사하는 것처럼 ‘승복’의 대상도 아니며, 누군가가 희망하는 것처럼 재고(‘재심’)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이고 단순명료한 현실의 서술일 따름이다. ‘대통령’ 앞에 붙여진 ‘전(前)’이라는 글자는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만큼이나 무겁고 절대적이다.

그것이 굳이 폭죽을 터트릴 만큼 감격스럽거나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이유로, 땅을 치며 통곡을 할 필요도, 애꿎은 분노를 표출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일은 그저 헌법이 미리 규정한 대로 탄핵과 파면의 절차를 밟았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탄핵의 대상이 자연인 박근혜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기관이고, 파면의 결과가 자연인 박근혜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직을 비우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누가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같은 상황에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자 주요 외신들도 한국 역사상 최초의 현직대통령 파면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국 BBC 방송, 미국 CNN 방송, 영국 일간 가디언,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홈페이지 화면. 헌법재판소가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자 주요 외신들도 한국 역사상 최초의 현직대통령 파면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국 BBC 방송, 미국 CNN 방송, 영국 일간 가디언,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홈페이지 화면.

그러나 문제는 2017년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선악의 뚜렷한 구분이나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때로는 ‘팩트(fact)’라는 말이 ‘의견’이나 ‘관점’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90%가 탄핵과 파면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 10%가 있으며, 양자는 평행 우주의 대척점에 기거하는지도 모른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고 점잖게 요약하자.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부분적 진실이라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와 명백한 증거들이 민의에 의해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권의 신속하고 비가역적인 파면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헌법재판관들을 아주 많이, 오래 괴롭혔을 것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해답은 또 다른 민의, 즉 입법부의 수적 우위와 정치적 판단에 따르는 미국 모델이겠지만, 우리 헌법은 그 부담을 오롯이 헌재의 규범적 판단에 남겨놓은 셈이고 그 답안은 지난 금요일 공개되었다.

헌재가 내놓은 답안만이 유일한 정답일 수는 없다. 예컨대 나는 여전히 세월호 7시간과 관련된 대통령의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이 파면사유로 인정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의 어느 친구는 어떤 탄핵 사안도 대통령 궐위를 가져올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친구는 간통죄 처벌 위헌 결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정치공동체의 공적 결정이 이런 과정일지 모른다. 의견은 갈리고 ‘팩트’는 흐리며, 갈등은 항존하는 곳에서, 승리자가 있으면 패배자의 눈물이 반드시 있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그 친구가 오늘의 불만을 뒤로하고 내일의 토론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정치공동체가 도달한 결론을 존중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언젠가 생각이 일치하는 장면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이라 생각한다.

정치인 박근혜에게 결정적으로 결여됐던 것은 이러한 다원주의적 가치들의 공존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들을 푸는 정답이 하나가 아닐 수 있고, 나의 답보다 더 나은 답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찾아 나가는 토론과 설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과서 국정화를, 사드 배치를, 개성공단 폐쇄를 전격적으로 결정하고는, 다른 목소리와 다른 해답들의 가능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정치인 박근혜는 스스로가 항상 올바른 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유일 가치와 위배되는 모든 사람과 세력들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어제의 적이 얼마든지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으며, 작은 것을 양보하면 큰 것이 돌아온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다. 다른 가치와 신념들을 배척하였고, 야당을, 여당의 대부분을, 의회를, 그리고 국민의 대부분을, 이제는 검찰과 헌재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적으로 간주하였다. 한 정당 분파의 지도자로서는 일관된 신념을 지닌 것처럼 보였겠지만, 한 국가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이상은 사인(私人) 박근혜의 사익추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 비극은 이러한 1970년대의 정치적 DNA가 아직까지도 전승되면서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을 끊임없이 감염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정답이 두 개 이상이라는 것을 당신은 인정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누구든 민주공화국에 설 자리는 없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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