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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현관 밖으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메르스에 감염되었다가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다. 한동안 병실에만 갇혀 있었던 탓인지 걸음걸이가 아직 어색하다. 그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와락 끌어안는다. 그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환자를 끌어안은 사람이 다름 아닌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우리나라가 메르스를 이겨낸 상징이 되고, 모든 언론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이것은 필자가 예측하는 정부의 메르스 사태 출구전략의 대미를 장식할 장면이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출구전략을 준비하는 듯하다. 시중에 떠돌고 있는 여러 버전의 출구전략 시나리오들을 참고해서, 향후 정부의 출구전략을 예측해 본다. 우선, 십자가를 멜 희생양을 정한다. 질병관리본부 지휘부, 삼성서울병원을 필두로 한 몇몇 병원들, 그리고 병·의원 전반의 부실한 감염관리를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이들의 어이없는 조치와 실상을 드러내는 언론보도가 늘어난다. 국민에게는 이성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한다. 경제부처 장관은 경제 상황을 우려하고, 심한 독감에 불과한 메르스를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떤다는 사회지도층의 훈계도 이어진다. 야권이 메르스 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추궁하면, 경제 회복의 발목을 붙잡는 정쟁을 멈추라고 경고한다.

환자 발생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 질병관리본부장을 경질한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질 가능성은 유동적인 듯하다. 세간에서는 장관 경질을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100일 넘게 팽목항을 지킨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잘 따라 한다면, 보건복지부 장관은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부실한 감염관리의 책임을 묻는 조치도 뒤따른다. 병·의원의 감염관리 의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추진된다. 국가방역체계를 전면 개편하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정부는 기존 조직을 일부 보강하는 수준으로 봉합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 대통령은 인상 깊은 대국민 메시지를 몇 차례 던진다. 먼저 이번 사태의 주범들을 준열하게 꾸짖는다. 그리고 국가 기강을 바로 세워서 이런 사태가 다시는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굳게 약속한다. 향후 근본적인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는 언급도 빠질 수 없다. 그 다음이 출구전략의 대미를 장식할 극적 장면이 등장할 순서다. 국민은 안도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한동안 국회가 떠들썩하겠지만, 가을로 접어들면 국회의 관심은 온통 내년 총선에 쏠리게 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면, 국민의 뇌리에서 메르스의 기억은 사라진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앙상한 규제 법 조항 몇 개, 종합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만든 힘없는 위원회, 격리병상 확충과 연구용역을 위한 얼마간의 추가 예산뿐이다.

부디 이 예측이 빗나가길 희망한다. 이런 구태의연한 출구전략은 또 다른 메르스 사태의 서막이 된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가려 책임을 묻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몇몇 공무원을 문책하는 것으로 어물쩍 끝내려 해서는 안 된다. 초동대처 단계에서 확진검사 기준, 격리 대상의 범위와 기준 등에서 혼선과 실책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방역체계의 이런 기술적 결함은 부차적인 원인이다. 신종 감염병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따라서 급변하는 상황과 새롭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기술적 결함을 바로잡고, 시급한 조치를 과감하게 실행하면 된다. 그러나 국가방역체계의 정점에 있던 행정 관료들은 일선 지휘부와 전문가의 의견을 번번이 묵살했고, 시급한 결정도 한없이 미루었다. 비전문가라서 잘 몰라서이기도 했고, 정무적 판단도 개입되었다. 이런 거버넌스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사람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별로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오전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가뭄피해 지역을 방문해 소방대원들과 함께 마른 논에 물을 뿌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감염관리를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규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던 원인도 함께 짚어야 한다. 병·의원 자력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일선에서 감염관리를 이끌 전문인력 문제도 심각하다. 3000개가 넘는 국내 병원 중에서 감염내과 전문의가 있는 곳은 100여개에 불과하다. 진료 수입이 다른 진료과의 절반도 안 되는 감염내과 전문의를 병원이 선뜻 채용할 리 만무하다.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극적인 장면도 연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선제적인 출구전략의 일환이라면 곤란하다. 선제적 대응은 초동대처 때나 필요한 것이다. 정부의 고전적인 출구전략이 항상 먹힌 이유는 일상에 바쁜 국민이 그 사건을 쉽게 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각의 대가는 가혹하다. 우리가 잊으면, 제2의 메르스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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