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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때문에 온통 난리다. 23일 현재 사망자가 27명, 확진 환자가 175명이고, 격리대상자는 수천명이다. 사람들이 바깥출입을 꺼리는 바람에 대형 매장, 병원, 식당, 가게, 대중교통이 모두 손님이 줄어 낭패이고, 그렇지 않아도 어렵던 경제가 더 위축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부가 초기에 메르스 관련 모든 정보를 공개만 했더라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삼성서울병원 이름을 공개하기만 했어도 확산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는 왜 초기에 쉬쉬 덮으려고 했는지 수수께끼인데, 나중에 메르스가 진정되고 나면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서 진실을 밝히고,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지금은 가래로도 막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요새 참여정부 재평가가 심심찮게 나온다. 2003년 사스(SARS)라는 역병이 세계를 강타했을 때 한국은 신속, 철저히 대비해서 한 명의 환자도 발생하지 않고 완벽하게 방어해서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지금 메르스라는 새로운 역병의 침입을 받아 우리나라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희생자가 속출하고, 온 국민이 공포에 떠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보니 참여정부의 대응이 돋보이는 모양이다. 차이가 무엇일까?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하느냐 않느냐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한꺼번에 대량의 인명이 희생된다는 점에서 역병과 기근은 비슷하다.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 무수한 인명을 앗아간 양대 공포, 양대 재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둘 다 민주주의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 발생으로 14일동안 마을이 통째로 격리됐다가 19일 풀려난 전북 순창군 장덕마을에서 주민 이성자(57)씨와 최복희(68)씨가 얼싸안으며 반가워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 위아랫집에 살며 자매같이 지냈는데 14일동안 얼굴도 보지 못했다"며 "이제 살 것 같다"고 말했다. _ 연합뉴스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제학자 중에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야 센 하버드대 교수가 있다. 센은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해 노벨경제학상이 발표되자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국제자유노조연맹(ICFTU)에서 수상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축하 성명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센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중 뛰어난 수학 실력을 갖춘 휴머니스트라는 점에서 케네스 애로와 비슷하다. 두 사람은 가장 존경받는 현존 경제학자라 할 수 있다.

센은 인도 출신이라서 그런지 불평등, 빈곤, 기근 연구로 유명한데, 그의 기근 연구는 아주 독특하다. 그는 1943년 벵갈 기근(200만명 사망), 1972년 에티오피아 기근(10만명 사망), 1973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기근(10만명 사망), 1974년 방글라데시의 기근(수십만명 사망)을 연구한 끝에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들 지역에서 기근으로 대량 사망이 발생한 원인은 식량 부족이 아니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세계 역사상 대기근의 원인은 식량 부족이 아니라 식량이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 관한 정보가 공개되지 못하고, 독재자들이 기근을 방비하지 않아도 쫓겨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不患寡而患不均)고 했는데, 기근에서도 생산의 부족보다는 분배의 불평등이 문제가 된다. 모든 인간에게 인간답게 살 평등한 권리가 인정되고, 정보가 잘 소통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근이 발생한 적이 없다고 센은 주장한다.

1994년 한국의 김대중과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아시아적 가치, 민주주의를 놓고 한판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리콴유는 원래 박정희를 숭배하고 독재를 찬양하는 자로서 ‘아시아적 가치’라는 궤변으로 민주주의 유보론(실상은 독재 옹호론)을 주장했는데, 김대중이 정면 반박하면서 세계 보편의 가치로서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이 논쟁 몇 년 뒤에 센은 민주주의는 세계 보편의 가치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존중되어야 한다는 글을 썼다. 센은 인류 역사상 20세기를 특징짓는 딱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메르스 사태가 이토록 확대된 것은 평소 소통이 부족하고, 권위주의적인 박근혜 정부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 등장 이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은 구체적 예를 들지 않더라도 모두들 수긍할 것이다. 아뿔싸! 민주주의의 후퇴가 대명천지에 역병의 확산을 가져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메르스 사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정우 |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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