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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이되 감동적이다. 지난 몇 주간 새로운 대통령의 행보다. 5·18 유가족과의 눈물의 포옹이 그 정점에 있다. 근현대사에서 우리 스스로가 생산하고 억압한 사회적 타자들의 다친 마음을 감싸는 대통령의 행동은 사실 생경하면서 감격적이었다. 시민들은 벅차고 야당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감동받아 우는 시민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연대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전 정권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새 대통령의 비의례적이되 적극적 소통의 행보로 더 도드라지는 이 풍경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비로소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 대통령으로서의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유가족인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우선 조직이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오랜 여성운동의 산물인 여성가족부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젠더는 그저 생물학적 남녀를 가리키는 ‘양성’이라는 단어에 갇혔고,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들은 성별 간 기계적 구분을 위한 업무로 여겨지는 사이, 아이돌 스타들의 치마길이나 감시하는 ‘조리퐁’ 정부기관이라는 꼬리표가 내내 따라다녔다. 진보적 여성운동과 페미니스트 집단 전체가 오해와 불신의 불똥에 화상을 입었다. 그 정점에 성평등 의식이 부재한 반(비)페미니스트 수장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권은 여성가족부의 위상 강화와 더불어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만든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참에 여성가족부의 예산이나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모든 정부부처의 정책들을 성평등 관점에서 견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성평등위원회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페미니스트 수장들에 의한 강력한 조직 장악력과 실천력은 필수다.

둘째, 적절한 인사다. 청와대 인사수석에 조현옥씨, 보훈처장에 피우진씨, 외교부 장관에 강경화씨를 지명한 점은 놀라움을 넘어선 인사다. 통상 ‘여성’의 자리에 생물학적 ‘여자’ 한둘을 배치하던 관행에서 벗어났고, 그들이 실질적 여성인권 향상에 헌신해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사에서 여성들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노골적인 여성비하 언사로 문제가 되는 남성은 청와대 행정관에 임명하면서 여성 인재풀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기가 찬다. 우리에게는 현장에서 일생을 헌신하신 언니들의 계보가 있다. 평생을 페미니스트로 자기 갱신을 거듭하며 삶을 살아낸 선배들이 있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투쟁의 장에서 이루어진 동지의 연이 있다. 제발 페미니스트들의 계보를 읽고, 이들의 경험을 높이 사는 인사가 되길 바란다. ‘명목상 여자’로 살면서 평생 갖은 이익을 누린 자가 아니라 다층적 불평등과 싸우며 평등 감수성을 체화하신 분, 남성들의 연줄 문화 속에서 숙주처럼 살며 만든 스펙에 주눅 들지 않는 강단을 지닌 분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시길 바란다. 바로 그분이 더 나은 미래의 상상력을 지닌 적임자다.

셋째, 내용이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여성단체들은 성평등 구현을 위한 과제들을 다각도로 제시해 왔다. 5대 핵심과제와 20대 주요 과제들이 대표적이다. 현 시점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우선 과제를 몇 가지만 꼽으면 다음과 같다. 대표성 제고와 성평등 추진체계 내실화는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뺐다. 모든 평등의 출발이자 헌법 정신을 구현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노동정의의 출발인 동일노동·동일임금 실현과 이를 통한 성별임금격차 해소, 재생산 정의 실현을 위한 낙태죄 폐지 및 현행 저출산, 육아, 보육, 일·가정 양립 정책 전면 재검토, 포괄적 젠더폭력 방지체계 및 법제도 마련(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성희롱, 스토킹, 데이트강간, 아내강간, 온라인 등 미디어의 성적 대상화 등 포함), 혈연중심의 봉건적 가족관을 넘어선 이주민, 한부모, 동거 가족 등 다양한 가족 지원 정책 등이다.

페미니스트는 생물학적 성으로 결정되거나 선언만으로 구현되는 정체성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멸시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며, 성적 착취를 당하고 차별받으며 폭력의 대상이 되다 마침내 죽어도 혹은 죽어야 되는 존재로 취급당해 온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조건에 대한 깊은 분노, 그 부당한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정의 구현 과정에서 ‘자라나는’ 정체성이다. 필자는 그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제 불평등한 젠더체제로 고통받는 타자들의 경험에 진심으로 다가갈 때다.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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