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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일이다. 어느날 서클(동아리)룸에 들렀는데 지금은 유명 정치인이 된 여자 선배가 내 손을 딱 잡더니 어딜 가자고 했다. 순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면서 겁이 났지만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선배 손에 이끌려 중앙도서관을 지나는데 저 멀리서 서클 4학년 남자 선배가 꽹과리를 두드리며 뭐라고 소리치면서 달려오는 것이었다. ‘어? 왜 저러지?’라는 생각조차 끝나기 전, 잠바 차림의 건장한 두 남자(사복경찰)가 번개처럼 달려와 선배의 어깨 죽지를 꺾고 끌고 가는 것이었다. 어디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지. “우리들은 ○○대다 훌라, 훌라~~”라는 ‘훌라송’을 부르며 순간 사방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집회·시위의 모습이다.

경찰이 최근 “평화적 집회·시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라”는 경찰개혁위원회의 권고를 전격 수용했다. 경찰개혁위원으로 권고안 작성에 참여했는데 작업 중에 대학 시절이 자꾸 떠올랐다.

무서운 기억 때문이었는지, 나이가 든 뒤에도 가끔 집회·시위에 참가할 때면 항상 불안했다. 경찰과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피하거나 얼굴을 감추었다. 불안감과 소심함은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반대 집회 초기에서야 비로소 떨쳐버릴 수 있었다. 가로막는 경찰도, 차벽도 없는 광화문광장을 늦은 시각까지 가족·지인들과 함께 걸으며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만끽하고 나라의 주인임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에서 그 느낌은 정점을 찍었다.

경찰개혁위의 권고는 경찰이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를 보장하고 옹호할 책무가 있다는 점을 천명하고 있다. 헌법 제10조에 명시된 “국가는 국민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당연한 상식을 왜 권고의 첫 문장으로 넣었을까?

경찰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기관이라고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권고문 작성 중에 집회현장의 경찰관을 여럿 만났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에게 집회와 시위는 전략과 전술을 잘 구사해 통제하고 관리하고 억제하는 것이지, 존중하고 옹호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지 않았다. 권위주의 시대의 경찰은 집회·시위에 참가한 국민을 툭하면 연행하고, 가두고,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집회·시위를 경험한 이들에게 경찰은 공포스러운 공권력의 얼굴로 각인돼 있다. 옛이야기라고 손사래를 치는 경찰도 있지만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직사살수에 맞아 쓰러지고 결국 사망한 것도 불과 2년 전이다.

권고는 집회신고를 간소화하고, 집회금지를 최소화하며, 집회 및 시위 과정상의 사소한 흠결에 대해서는 경찰권 행사를 절제할 것을 제시했다. 일부에서 경찰권 약화를 우려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 경찰 본연의 역할이자 의무일진대 이제야 비로소 경찰이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물론 안보와 공공질서를 위해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다. 그 경우에도 법률유보의 원칙 및 과잉금지의 원칙에 따라 법률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돼야 한다. 최상위법인 헌법에 기본권을 명시한 것은 기본권 보장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집회·시위는 본질적 속성상 시민의 불편이나 업무 공백을 낳는다. 헌재의 결정에서 보듯 집회·시위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민주적 공동체에 불가결한 요소다. 더구나 정치적 소수집단에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기본권이란 점에서 집회·시위로 인한 교통체증 등은 민주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일정 정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집회·시위가 더 증가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대부분의 집회·시위는 정치권이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생겨난다. 경찰이 평화적 집회·시위를 보장한다고 이유 없이 집회·시위를 벌일 국민이 있겠는가.

경찰도 할 말이 많다. 중요한 결정은 청와대, 법무부, 국정원 등 힘센 기관이 결정하고 경찰에겐 진압하는 악역만 맡겼다는 것이다.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인권을 보장하는 데 충실한 인권 경찰로 거듭날 때, 경찰의 목소리는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집회·시위 권고문은 무려 A4 용지 13쪽에 이를 정도로 종합적이고 세밀하다. 경찰 수뇌부는 일단 많은 권한을 내려놓았다. 현장의 경찰은 촛불집회에서 나름 인내하면서 평화시위의 동반자가 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이러한 경험을 살리고, 권고문을 숙지하며, 여기에 이를 지켜보는 주권자 국민의 애정과 감시가 보태진다면 인권경찰로의 재탄생도 가능하지 않을까. 희망이 현실로 구현되길 기원해본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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