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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제도와 시스템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정치의 문제를 실컷 성토하고는, 모든 게 제도와 시스템 문제라는 결론을 내는 경우도 많다. 글쎄, 제도나 시스템이 그대로라서 우리 정치가 이 모양일까. 필자가 아는 한, 우리처럼 제도와 시스템이 많이 바뀌는 정치는 없다. 한동안 딴 데 관심을 두다 돌아와 보면, 예전 제도나 시스템을 찾기 어렵게 달라져 있는 것이 한국 정치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부처 이름 바꿔대는 통에 적응을 하다하다 못해 이제는 아예 새 부처명 외우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곳도 우리 정치다. 현재와 같은 민주통합당의 무정부 상태 역시 매번 지도체제를 바꾸고, 선출제도를 바꾸고, 공천제도를 바꿔 왔던 것의 결과인 면이 크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 제도와 시스템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겁이 난다. 별 생각 없이 상투적으로 그러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파고드는 사람을 볼 때면 인간 행위를 인위적 틀 안에 묶어두려는 전체주의적 심성의 소유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잦은 제도변화와 시스템교체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최대 특징이 됐다. 제도나 시스템이 달라지면 그것을 다룰 인력과 예산이 생긴다. 그렇기에 제도와 시스템의 변화가 누군가에게는 권력 자산을 늘릴 계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성취하고 싶은 자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연구용역의 기회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손쉽게 돈을 벌 사업아이템이 된다. 한국의 정치권 주변이 온통 제도 고안자들과 시스템 기획자들로 넘쳐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학계와 언론, 시민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과 시민사회가 과도하게 정치화되거나 위선적인 정치관을 갖게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모두가 정치를 욕하고 비난하지만, 그것의 다른 짝인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매개로 공식·비공식적 차원 가릴 것 없이 정치에 경쟁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이미 권력자원과 영향력이 집약되는 신종성장산업이 됐는데, 이를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가 여러 이해관계와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블랙홀이 되면서, 공적 헌신과 책임성의 윤리 위에 정치가 튼튼히 자리잡을 여지는 좁아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제도의 문제로 환원되는 정치는 좋을 수가 없다. 정치철학의 대가들이 말하듯, 정치는 매우 실천적인 분야이고 제도나 체계의 문제로 다룰 수 없는 비공식적 영역이 훨씬 더 큰 세계다. 정치가 공식적인 제도나 체계의 문제로 충분히 다뤄질 수 있었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그 많은 싸움과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어디에든 적용 가능한 이상적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장단점을 서로 나눠 갖는 것이 제도다. 다른 나라에서 잘 작동하는 제도를 들여온다고 그런 효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정치철학의 대가들은, 정치적 실천을 통해 성과를 내는 것이 먼저고 그렇게 형성된 성공적 상호 작용의 패턴을 제도화해 가는 것이 다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 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이 12일 국회에서 만나 정치개혁과 공통공약이행을 위한 여·야 6인협의체 구성과 운영에 합의했다.



최근 여야는 개헌 논의를 공식화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정치가 무슨 대학원 세미나 하듯 할 수는 없을 텐데, 아무튼 정치의 문제가 또다시 제도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순수 제도론의 관점에서 말하라면, 대통령 중심제보다 의회 중심제가 민주적으로 더 우월하다. 선거제도는 단순다수제보다 비례대표제가, 정당체제는 양당제보다 온건 다당제가 민주적 기준으로는 훨씬 더 낫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변화가 단박에 실현되면 좋겠지만, 그런 순진한 기대와 지금 여야의 생각은 거리가 멀다. 논의의 장이 열리면 우리 사회의 거대 이익들이 들어와 각자의 관점에서 개헌 투쟁을 할 텐데, 그 결과가 어떨지도 두렵다. 아무리 봐도 “지금과 같은 잘못된 정치는 우리 때문이 아니라 헌법 때문”이라는, 여야 모두를 위한 해석 틀로만 보일 뿐, 거기에 그 어떤 공익적 유익함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답지 못하고 여당답지 못하고 야당답지 못하다는 것이 시민 다수의 합당한 불만인데, 그에 대한 여야의 대답이 “그럼 개헌을 논해 봅시다”라면 솔직히 사양하고 싶다.


박상훈 |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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