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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지 않다. 한 청와대 남성 행정관의 ‘부적절한’ 책,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한 여성 의원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비난과 공격. 묵언수행하듯 버티고 있는 당사자. ‘보편적’ 한국 남성의 정서를 반영한 예측 가능한 행동이었기에 솔직히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정작 실망스러운 것은 당사자를 끼고 도는 몇몇 높으신 분들이다. 성차별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 국정운영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에 큰 문제의식이 없는 듯하다.

이 정권의 탄생을 눈물겹도록 반기고 지원하고, 성공하길 기원하는 한 시민으로서 주요 인사검증 과정에 ‘성평등’이란 요소를 꼭 고려할 것을 고언한다. 물론 평등의식은 가치관이라 검증이 쉽지 않을 터. 추후 구체적인 평가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고려해야 할 이유는 단순하다. 진보의 갱신, 이를 통한 문재인 정권의 성공,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다. 안보와 경제관만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잣대가 아니다. 글로벌 다문화사회에서 젠더와 인종, 섹슈얼리티는 사회적 지위를 새롭게 만들고 차별을 심화하는 주요한 사회적 축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분할선에만 집중한다면 이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한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직조하는 불평등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화·재생산할 가능성마저 있다.

무엇보다 잘못된 분배가 야기하는 양극화와 계층의 공고화는 사실 차이에 대한 불인정 및 무시와 긴밀히 연관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겪는 성적 대상화, 성적 희롱, 성폭력, 성매매 등의 문제는 무시, 경멸, 비하, 혐오 등 ‘여성’에 대한 오랜 문화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인식은 성별직종 분리, 임금격차, 유리천장 등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겪는 부정의를 생산하고 정당화한다. ‘여성의 일’이라 여겨지는 자리에 배치되는 그 여자는 일터에서조차 동등한 노동자가 아니라 ‘여성스럽기-여성스럽지 않기’를 모순적으로 강요당하며, 희롱의 대상이 되거나 마침내 “먹히는” 대상이 된다. 공사영역을 넘나드는 여성들의 이중노동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영역의 차별이 연결된 전형적 현상이다. 그저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평면적 차이가 아니다.

임신한 선생님이 생산과 재생산 노동에 힘겨워하는 시민이 아니라 “섹시한 여자”로 인식되는 이유는 남성 욕망의 배출구로 취급되는 젠더관이 보편적 남성문화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프로정신’이 없어 여자들은 뽑고 싶지 않다, ‘뽑으려 해도 인재가 없다’고 말하는 남성들, 여성에게 성적 모욕과 폭력을 일삼는 룸살롱 단골 아저씨들, 이들이 ‘사회지도층’인 것은 우연적 모순이 아니라 필연이다.

저출산 정책과 일·가정 양립 정책은 물론 노동 정책 전반에 젠더관점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배 부정의를 교정한답시고 내놓는 정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평등의식, 인권의식을 장착하지 못한 차별주의자들이 정책 ‘과정’의 주요 작인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 정권에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이 한 번도 동등한 시민으로 평등권을 전면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출발선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평등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민주주의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 아닌가. 평등이 사회적 합의란 명목으로 미뤄질 문제인가. 자신의 무지함을 만천하에 공공연히 ‘자랑질’하는 자가 민주주의 공고화에 어떤 기여를 할까. 과거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나누었던 그 대화가, 남성문화 속의 일상적 언행들이 실제 여성들의 삶에, 불평등의 공고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면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을 보필할 자격이 있는가.

이제야말로 이 정권의 일꾼들은 성평등, 반차별이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천명하고 실천하시라. 정파적으로 혐오발화를 판단하고 모순적으로 용인하며, 발화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순간, 혐오집단은 ‘우리’ 내부에 깊숙이 씨를 뿌리고 성장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이 정권의 성공에 아니, 민주주의 구현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고매한’ 인품과 윤리, 도덕을 따지는 자들이 아니다. 신상털이를 통해 개인을 단두대로 보내자고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유로울 자 없다.” 백번 옳은 말이다.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과거의 어떤 행위가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죄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과거의 부정의한 구조에서 비롯된 자신의 행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성찰하는 태도다.

잘못을 복기할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 성장은 여기서 일어난다. 그래야 ‘진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성도덕주의자로 위장한 자기분열적 혐오주의자들, 차별주의자들, 범죄자들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 시민들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진부한 남성연대를 혁파하고 평등을 기준으로 보수 남성들을 갈라내는 과정을 진심으로 보고 싶어할 것이다. 2017년 아닌가!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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