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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일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이제 3주 뒤면 차기 대통령이 선출된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선거판을 대하는 주변의 보통 사람들의 표정이 시큰둥하다. 흥이 나지 않고 신바람도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보통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누가 대통령이 된들 내 인생이 뭐 크게 달라지겠어?’라는 체념이 있다.


5년 전인 2007년의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더냐’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많은 국민들은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가 출범할 때 개인적으로도 더 행복한 세상이 될 거라고 나름 기대가 컸다. 그런데 실제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비정규직과 미취업 청년이 크게 늘었다. 명예퇴직 당한 후 음식점과 통닭집을 창업한 자영업자들이 크게 늘고 그중 상당수가 파산했다. 이중 일부는 노숙인으로 전락하거나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40~50대에 명퇴 당한 ‘사오정’과 취업·연애·결혼 포기의 ‘3포 세대’도 민주정부하에서 시작됐다. 그에 반해 주식투자 등 재테크에 밝은 부자와 고소득 월급쟁이들의 형편은 민주정부하에서 크게 좋아졌고 게다가 과거에는 없던 외국자본, 투기자본이 판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말기에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더냐”라는 빈정거림이 유행한 것이다.


 민주주의하에서 보통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이 더 힘들어지다보니, 국민들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민주투사도 아니고 부패 혐의가 짙었는데도 ‘그래도 그가 되면 밥은 먹여주겠지’라고 기대하며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기대를 저버렸고 집권 후에는 오직 부자들만 잘살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기대가 좌절되어 배신감을 느끼면서 다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정권교체 정서가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선거판에 흐르는 밑바닥 정서 역시 ‘과연 어느 후보가 밥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줄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팍팍한 삶을 과연 어떤 후보가 해결해줄지 국민들은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는 총체적으로 보면 성공한 정부였다”고 말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된들 자신들의 삶이 나아질지 여전히 의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기 전부터 안철수 열풍은 이미 잦아들고 있었다. 힘겨운 인생살이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던 수많은 이들이 영웅을 기다려왔다. 그렇지만 안철수 현상으로 표현된 상상 속의 안철수, 상상 속의 영웅에 대한 환상은 하나씩 깨져 나갔고 현실 속의 안철수,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세속적인 안철수의 모습이 하나씩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안철수가 난세의 구세주가 아니라며 실망했다.


(경향신문DB)


그러면 안철수가 사기꾼이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늘 자신은 빌 게이츠 같은 착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자본가, 그리고 실리콘밸리처럼 혁신적인 자본주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또한 자신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상식파이며, 착한 혁신적 자본주의야말로 자신의 꿈이요 이상(理想)이라고 말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안철수가 사람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 영웅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이 스스로를 속였던 것이다. 마치 사막을 여행하다 길을 잃은 목마른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갈망한 나머지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영웅에 대한 기대의 배후에는 변화에 대한 갈망,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열망이 있다. 안철수 현상이 꺾이면서, 그리고 안 후보가 사퇴하면서, 안철수라는 그릇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도 꺾이고 있다.


영웅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며, 시대정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영웅은 사이비 영웅일 뿐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 기대와 열정을 집약해 그 시대가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이해하며 끌고나가는 자가 영웅이다. 그렇다면 영웅이 죽은 이 시대에 진정 우리가 토론해야 할 주제는 그 영웅이 안철수냐 아니냐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 열정을 담아 이 난세를 헤쳐나갈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갈 미래, 그 꿈과 이상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시대정신의 집약체가 바로 이념이다.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빈곤이 얼치기 영웅들의 등장과 소멸을 낳는다. 위력을 잃은 안철수 열풍과 여러 진보정당들의 몰락,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보여준다. 즉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에 386세대의 등장과 함께 출현했던 제반 사상과 정신의 종말이요, 그것들과 결합됐던 정치의 종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과 정신, 새로운 정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과 어지러움은 계속된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정신, 새로운 꿈과 이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라는 분리된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내는 단단한 시대정신,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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