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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정의 달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5월을 풍요의 절기로 보아, 가정의 풍요를 축복하는 달로 삼았다. 덕분에 5월은 각종 축제의 절기이기도 하다. 또한 화창한 봄이 시작되면서 움츠렸던 대지의 만물이 소생하고 동시에 야외활동이 늘어나는 스포츠의 달이기도 하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은 유년시절이던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모국 프랑스가 쇠퇴하는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다. 20세에 영국으로 유학한 쿠베르탱은 청소년 교육의 중심이 스포츠에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감명받는다. 그래서 당시 지식 전수에만 급급했던 프랑스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정부로부터 외면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를 만들고, 1896년 제1회 올림픽 대회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당시 만들어진 올림픽 정신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Citius, Altius, Fortius)”로 집약된다. 하지만 쿠베르탱은 ‘입상도 중요하지만 참가에 더 뜻이 있다’는 철학을 강조했다. 올림픽이 엘리트 체육에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일반 시민들이 즐기는 생활체육으로 발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쿠베르탱의 모국 프랑스에서 우리는 오늘날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학입학시험 바칼로레아(Baccalaureat)에 체육이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 국어, 수학, 외국어와 똑같은 배점으로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나라도 한때 체력이 국력이라며 학교 체육을 강조하고 대학입학시험에서 체력장을 치른 적이 있었다. 체육 시간에 축구이건 소프트볼이건 편을 나누고 포지션을 정해서 한바탕 경기를 하고 나면 체력과 단결심을 기르고 책임감과 룰에 승복하는 일종의 준법정신을 배웠을 뿐 아니라 청소년기의 스트레스나 입시 부담도 잠시나마 땀으로 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교육에서 체육은 항상 후순위였다. 지육(智育), 덕육(德育), 체육(體育) 순이 전통적인 교육의 가치관이었다. 체육은 무시하고 오로지 학력만 중시한다.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체육시간이 자율학습으로 대체되거나 아예 사라져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늘고 스포츠-레저 등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하는 추세에서 체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7세기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의사인 존 로크(J. Locke)는 교육의 우선순위를 지(智)·덕(德)·체(體)가 아닌 체·덕·지로 보았다. 그가 쓴 교육에 관한 책을 보면 전체 24장 가운데 서장(序章)인 제1장이 신체의 건강에 관한 이야기다. 제2장부터 제19장까지는 습관, 상과 벌, 예절, 가정교육, 부친의 권위, 아이의 기질, 아이의 자유와 버릇없음, 울음, 겁 많음과 잔인한 행동, 호기심, 게으름, 일의 강제, 장난감, 거짓말과 변명, 덕성, 지혜, 예절교육 등을 서술했다. 그런 다음 제20장에 가서야 비로소 ‘학습에 대하여’가 나와 로크는 교육의 우선순위가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에 있음을 밝혔다. (로크의 <교육론>, 박혜원 역)

이 책은 전형적인 귀족 가정의 자녀들을 ‘신사(gentleman)’로 키우기 위한 자녀교육 지침서이지만, 현대 사회의 민주시민을 기르는 데에도 매우 유효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2002년 서울대 총장이 되었을 때 처음 찾아 읽은 책이 로크의 &lt;교육론&gt;이다. 1690년대에 나온 책을 서울대 총장이 된 직후 읽은 이유는 교육이나 인성의 기본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믿음에서였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명제지만 입시지옥, 학벌 사회에 사는 우리 현실에서는 가정과 학교 모두 체육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한국경제가 외국을 추격할 때 고도성장의 주역은 과감한 투자로 대량 육성한 산업화 맞춤형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이끌 핵심 역량은 유연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핵심 인재들은 어떻게 길러내야 할까? 그 답은 바로 우수한 교육에 있다.

우수한 교육이란 먼저, 스트레스가 과중한 학생들의 심신을 건강하게 길러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자신감을 갖도록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입시과정과 교육과정에서 다양성을 강조하여 창의성을 제고해야 함은 그다음이다.

체력은 타고난다고 하지만 노력에 의해서 향상될 수도 있다. 체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기도 했다. 내 체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훨씬 더 생산적인 교수,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 총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실제로 세계에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이 가장 잘되어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의 교육은 처음에 ‘체육’,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덕육’, 그다음에 또 여유가 있으면 ‘지육’의 순서로 한다. 존 로크 시대는 물론이지만 오늘날에도 영국에서는 일관되게 체육을 강조한다. 영국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크리켓이다. 그러고 나서 공부를 시작한다.

윈저궁 근처에 있는 이튼 칼리지에서는 전통적으로 2·3월 추운 날씨에도 학생들이 반바지·반소매를 입고 진흙 위에서 레슬링을 하였다. 한 번은 이튼 칼리지 선생에게 학생들을 왜 그렇게 힘들게 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분이 “이래야 인재가 나온다. 19세기 영국의 총리들은 거의 다 이튼 칼리지 출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했었다.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그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며 신체가 허약한 사람들이 영국의 총리가 되더니 영국이 결국 세계 제1의 자리를 미국에 내주었다”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대답을 했다.

미국도 초·중등 교육이나 대학교육에서 체육을 매우 중시하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체육을 중시한다. 초·중·고에서도 그렇고 대학에서도 그렇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다 그렇다. 대한민국 교육도 이제 지·덕·체를 지양하고 체·덕·지로 가자.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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