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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세 번은 깨지 마라

opinionX 2018. 5. 2. 14:40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며 환호하는 모습을 두고, 어떤 어르신들은 전쟁도 모르고, 그래서 공산당 무서운 줄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라고 비난하지만 그 무슨 서운한 말씀. 이래봬도 나름 독하게 반공교육 받은 세대다.

소식 없던 옆집 삼촌 나타나면 간첩이니 신고하라고 배운 세대이고,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며 용감하게 죽어간 이승복 어린이의 용기를 가르침 받은 세대이고, 어느 하루는 길에서 조악한 재질의 인쇄물을 주워 집에 가지고 갔다가 당장 버려야 한다고 화들짝 놀라고 두려워하던 엄마의 눈빛을 본 적 있는, 아, 이게 학교에서 말하던 삐라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가 이런 걸 주운 자체가 간첩이고 빨갱이라며 등짝을 얻어맞은 적 있는 세대이고, 무찌르자 공산당, 이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며 해 저무는 운동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무줄놀이를 했던 세대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남학생은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훈련 받고, 여학생들은 짝꿍 머리에 하얀 붕대 친친 감는, 전시 간호업무에 관한 교육을 받던 세대이다. 반공글짓기와 표어, 포스터를 그리면서 해마다 어떤 문장이 더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는지, 어떤 그림이 혐오를 더 드러낼 수 있는지를 고민했던 세대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그날, 그 오랜 시간 동안 상상 너머 폐쇄된 공간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의 근원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모습에 더 신기하고 벅찬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개인적으로 반공교육의 상징처럼 여기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해돌이의 대모험>이라는 반공 만화영화다. 주인공 해돌이가 납북된 아버지를 찾으러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들어가서 북한의 참상을 알고 아버지를 구출하는 활약상을 그린 이 만화영화를 모르는 내 또래 세대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해돌이의 대모험>을 금호동에서 응봉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던 현대극장에서 봤다. 극장 앞은 영화를 보러 온 동네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는 ‘이북동포’를 착취하는 붉은 돼지 수령의 모습에 분노하고,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이 적들을 무찌르는 순간 다 함께 환호했는데, 그 환호의 순간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 기억은 오류다. 인터넷에서 <해돌이의 대모험>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면 이 작품은 탈북자들과 북한전문 자문위원의 도움을 받아 유례없는 ‘고증’을 거쳤으며, 실사를 활용해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기록과 더불어 반공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돼지나 늑대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북한군을 그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아버지를 구출하고 적을 무찌르던 주인공은 (꿈이었던 걸로 밝혀지기는 하지만) 쫓기다 사살당한다. 그런 충격적인 장면을 나는 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흥미로운 건 나뿐 아니라 영화를 기억하는 동세대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여전히 그 만화영화 속 북한의 모습을 붉은 돼지로 기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들을 인간으로 배운 적도, 생각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어서 인간의 모습일 때도 인간으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모처럼 훈훈한 봄바람이 부는 것 같지만, 가로막힌 철창 너머로 과감히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두고, 여전히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정치적으로 말이 많다. 우려의 시선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무려 반세기 넘어 폐쇄된 공간에서 핵과 전쟁으로 협박을 일삼던 이들의 화해를 다 믿고 가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선언을 해도 이행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이행의 과정까지는 숙제가 많다는 것을 그 이행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이제까지 앞서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잘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시작부터 견제가 아니라 응원과 관심일 것이다. (북한에) 두 번을 속으면 바보고, 세 번을 속으면 공범이라고 말한 정치인이 있다던가. 하지만 그 말은 지난 시간 어렵게 이룬 남북협력관계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에 붙여도 맞는 말 같다. 두 번을 깨면 바보고, 세 번을 깨면 (모처럼의 평화체제를 깨고 싶은 이와) 공범이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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