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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다양한 사회적 갈등은 있었다. 그러한 갈등이 때로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며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사회 진보의 변곡점이 되기도 했다. 갈등이라는 게 본래 사회 구성 요소 간의 모순 관계에서 나오므로, 공동체의 통합과 지속 가능성은 이러한 갈등을 대하는 사회적 역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사회의 존속은 정치·제도의 기능적 시스템과 함께 사회적 합의가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의 사회적 합의(consensus)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합의에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중재하는 지혜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일찍이 네덜란드는 국가노동위원회를 설립하여(1919) 노사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석유 위기가 닥치자 노·사·정이 다 함께 바세나르협약(1982)에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1990년대 유럽을 강타한 통화위기 상황에서는 노사정협의회를 통해 ‘새로운 진로협약’(New Course, 1993)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나라는 사회적 갈등 해소를 기능론적으로 접근해 주로 법과 제도에 의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979년 도입한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가 그 하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사업영역 다툼에서 약자인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도입했다가, 중소기업이 성장보다는 현실에 안주한다는 지적에 따라 2006년 이를 폐지하였다. 그러자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무차별 진출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2010년 말 출범한 동반성장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나는 이 문제를 놓고 크게 세 가지에 주력했다. 첫째, 대기업의 동반성장 노력을 협력 중소기업이 평가하는 동반성장지수로 만들어 대기업이 동반성장에 나서도록 독려했다. 둘째, 대기업이 순대, 떡볶이 및 동네 빵집에 진출하는 것 등은 소상공인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보호막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중소기업 적합업종인데 사실은 ‘대기업 부적합업종’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정부 발주를 아주 큰 규모가 아니면 중소기업으로부터 직접 하도록 하였다.

2011년 도입된 중소기업 적합업종은 지난 7년간 322개 품목을 신청받아 117개를 지정했다. 원래 3년 보호가 원칙이나 한 차례 연장이 가능해 최대 6년간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2018년 5월 현재 108개 업종과 품목에 대해 권고 73개, 상생협약 29개, 시장감시 6개 등으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5월 국회에서 적합업종 품목 가운데 소상공인의 생계가 달린 일부를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따로 분류하여 올해 12월13일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도록 했다. 생계형 적합업종은 적합업종으로 지정되었던 품목 중에서 신청할 수 있어 그야말로 생계를 위한 업종과 품목으로 제한하도록 설계되었다. 지난 6월4일 민주연구원의 ‘이슈브리핑’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상호출자제한기업의 계열사 가운데 제조업 진출은 90개가 늘어난 반면,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이른바 골목상권에 진출한 기업은 387개나 늘어났다. 생계형 적합업종의 법제화가 왜 불가피한지를 보여준다.

상호출자제한기업 계열사를 다른 말로 대기업이라고 한다. 대기업이 신규산업이나 R&D가 필요한 첨단 분야보다 골목상권에나 진출해 손쉬운 돈벌이에 나선 것이다. 대기업은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를 무대로 나서야 하는데 기껏 골목상권에나 진출하고 있으니 소상공인의 밥그릇 빼앗기가 아니라 밥상 자체를 약탈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생계형 적합업종의 하위 법령 및 규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어떤 업종과 품목을 생계형으로 지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뜨거운 감자다. 심의 기준으로 시장의 구조, 참여사업체 규모, 소득의 영세성, 소비자 후생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생계형 적합업종의 지정을 두고 또 다른 갈등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입법 취지를 살리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첫째, 사회안전망으로 인식해야 한다.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되면 5년간 보호는 받을 수 있지만, 그 기간 동안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생계형 업종에 종사하는 대부분 소상공인들은 보다 큰 사업기회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투자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계유지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제공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나라 소상공인은 650만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공동체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도 이들에게 사회안전망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실효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우리 경제가 적합업종을 지정하는 것은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이 많다. 그러나 650만명의 생계형 업종 종사자들의 생존 위기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사회적 갈등의 증폭은 물론이려니와 막대한 사회적 비용 지출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기존 중소기업 적합업종의 강제성과 실효성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질 생계형 업종은 대기업의 사업 인수·개시 또는 확장을 금지할 수 있도록 촘촘하게 보완해 실행할 필요가 있다.

셋째, 사회적 합의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인식해야 한다. 생계형 업종의 법제화 과정에서 발생할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합의 전통을 세우는 계기가 되도록 힘쓸 필요가 있다. 언뜻 사회적 합의가 강제성이 약해 실효성이 떨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유럽 사례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이번에 지정될 생계형 업종은 법으로 정해지지만 중간과정에서 수많은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사회적 합의는 법이나 규정보다 때론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다.

생계형 적합업종의 지정은 동반성장을 실천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장치로 만들자. 이를 위해서는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를 수도 있다’고 포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원래 갈등(葛藤)은 칡뿌리가 시계방향과 땅으로, 등나무는 시계 반대 방향과 하늘로 자라나는 정반대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이다. 이처럼 ‘갈등’은 외곬으로 자라나는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계형 적합업종의 법제화 과정에서는 주어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내는 담쟁이덩굴처럼 유연한 사고와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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