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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기 전부터, 아니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숲을 파헤치기 전부터 그곳에 정원이 있었다. 정원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자연의 한가운데를 파헤치고 들어앉아 다시 자연을 끌어들일 인위의 공간을 만든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숲은 사람이 들어앉을 공간을 내주기 위해 이미 충분히 양보한 터였다.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세 그루의 참나무가 살아남았다. 그 사이의 빈 공간은 무엇으로든 채워져야 했다.

아파트 베란다에 처박혀 있던 난초, 무심한 주인을 닮아 십여 해 동안 한 번도 꽃을 보여주지 않았던 난초가 화분에서 해방돼 자리를 잡았다. 실상은 그곳에 버려졌다. 숲 아래 대나무 사이로 자라던 후박나무는 숲을 가로지르는 수도공사를 하며 뜯겨와 그곳에 심어졌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키 작은 몇 그루의 나무들과 풀 몇 포기가 있게 되자 졸지에 정원은 나름의 모양새를 원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키 큰 진달래 앞에 작은 진달래가 하나 더 놓여 있어야 제격일 것 같았고, 한 뼘만 하게 자란 소나무가 자리 잡을 공간이 또 필요했으며 오솔길을 가로막은 정금나무를 후박나무 옆에 놓아야 했을 때는 이미 정원이라고 불러야 할 곳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푸근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듯 말 듯 감질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뒤뜰에 심어놓은 매화 때문인지도 몰랐다. 꽃망울 끝이 조금 갈라져 비율로 치자면 노루 엉덩이만큼의 흰빛을 보여주었을 때, 그리고 그로부터도 한참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매화에 그만 화를 내고 말았다. 급기야 장날 읍내로 나가 꽃을 사오게 됐다. 히아신스와 무스카리. 바람이 드세고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꽃이 한두 포기 심어지자 꽃밭에 대한 욕망이 더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숲에 들어가 씨가 떨어져 한 뼘도 못되게 자란 편백나무와 어린 삼나무를 캐어와 심기도 하고 어디나 지천인 사스레피 나무를 둔덕에 심기도 했지만 꽃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이 인간이 사는 공간을 꾸미는 장식의 일부가 되었을 때 정원이 시작되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인간이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욕망의 산물이다. 마당 한 귀퉁이에 꽃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퇴비를 덮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잡초를 거두어내며, 가지를 치는 일들이 거실에 모노륨을 깔고, 벽지를 바르며, 소파를 들이고, 텔레비전을 사 걸고, 커튼을 새것으로 바꾸는 일과 얼마나 다른가? 뒷마당의 매화가 얼마나 멋지게 피었는지 이웃의 손을 잡아끌고 가 기어이 코앞에 들이대고야 마는 행위와 엊그제 새로 들여놓은 냉장고의 문을 우아하게 열어 보이는 행위는 또 얼마나 다른가?

순천만 정원 국가정원 1호로지정 _ 연합뉴스


욕망의 크기와 성격, 대상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 물질에 대한 욕망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원사가 딸려 있는 저택의 향나무나 강변에 자리 잡은 별장의 뒤틀린 소나무를 보면 두 욕망이 그리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과꽃과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피어 있는 시골 외갓집의 소박한 꽃밭과 글라디올러스와 튤립과 칸나가 자라는 별장의 정원이 어떻게 다른지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자연을 소유하는 것 역시 물질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번쩍거리는 주상복합의 아파트를 감싼 소나무, 기하학적 건물 사이를 채운 대나무들은 자연과 극단적으로 멀어졌을 때 자연조차 인위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강박의 결과이다.

꽃과 나무를 소유하려는 욕망에 대해서는 그게 아무리 지나치더라도 우리는 관대하다. 자연에 대한 본능이 아직 남아서일까? 매화는 3월 중순이 되어서야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작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간난아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릴 때 드러나는 하얀 앞니처럼 꽃잎을 한두 개 내놓더니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나머지 꽃잎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오늘내일한 지 보름 만이다. 한 번 꽃을 틔우자 언제 새침을 떨었나 싶게 꽃들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자연은 때가 되면 욕망을 자연스럽게 채워준다. 인간이 안달하거나 말거나.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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