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1년 3월12일 이탈리아의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가 공연되고 있었다. 3막의 유명한 합창곡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가 막 끝나고 객석에서 앙코르 요청이 쇄도하자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는 갑자기 객석을 향해 돌아서서 예정에 없던 짧은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만세(Viva Italia!)’를 외쳤던 관객들에게 합창곡 가사의 한 구절을 빗대어 담담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 만세라, 글쎄요. 이탈리아가 이런 식으로 간다면 이 노래의 제목은 ‘아름답지만 잃어버린 조국’이 될 겁니다.”

당시 부패와 성추문으로 얼룩진 베를루스코니 정권이 포퓰리즘적 세금 완화 정책으로 악화된 정부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문화예술 예산의 대폭 삭감 조치를 취한 데 대한 비판이었다. 이어서 무티는 관객들을 향해 앙코르곡 합창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고 기꺼이 기립하여 노래하는 청중들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등지고 지휘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이 합창곡이 흔히 ‘히브리 노예의 합창’으로 불리는, 이탈리아인들의 비공식 애국가다.

실제로 1842년 초연 당시 작곡가 베르디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민중의 처지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투영했다. 하지만 베르디가 표현한 것은 맹목적 애국주의가 아니었다. 사회성 짙은 그의 오페라들은 사회적 개인이 가족애와 연인에 대한 사랑 등 실존적 갈등과 딜레마 속에서 지향하는 국가적(민족적) 명분을 표현하고 있으며 초기 걸작인 <나부코>도 예외가 아니다.

이탈리아의 통일 150주년을 기념한 이날 오페라 공연에서 지휘자 무티는 베르디식의 애국가가 어떻게 불려야 감동을 만들 수 있는지를 음악가의 직관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애국가, 즉 나라 사랑하는 노래는 국가를 향한 시민의 자발적 외침일 때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칫 그 반대가 될 때는 추악한 노래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역사를 배운 이탈리아인들이라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윤치호가 쓴 애국가. 1907년 작사한 것으로 현재의 가사와는 군데 군데 다른 곳이 보인다. (출처 : 경향DB)


나라 사랑하는 노래는 인류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 부르게 된 노래다. 한반도 사람들도 20세기 들어서야 그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암울한 식민지 시기 독립군가가 그랬고 ‘올드랭사인’ 곡조에 맞추어 부르던 애국가가 그랬다. 해방 이후 같은 가사에 다른 곡조로 부르게 된 지금의 애국가 또한 그렇다. 작곡가의 친일 행각이 밝혀져 적잖은 오점이 찍혔지만 1960년 4·19혁명의 학생들도 1980년 오월 광주의 시민군들도 안익태 작곡의 이 애국가를 불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도 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월드컵의 애국가는 격이 떨어진다고 얘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애국가 역시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며 불렀던 자발적 시민들의 노래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애국가가 위와는 정반대 의미로 불렸던 기억들이 있다. 영화 <국제시장>의 유명한 국기 하강식 장면은 그 집단적 기억을 풍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부부싸움까지 멈춘 채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선 채로 찡그린 표정으로 듣던 영화 속 그 애국가는 국가와 사회의 존재 의의를 묻고 요청하는 시민의 노래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시민의 자격을 억압적으로 심사하는 권력자와 관료들의 노래였을 뿐이다.

최근 여당에서 추진하는 이른바 ‘애국3법’에는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정식 제정하고 공적 행사에서 애국가 제창을 의무화하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애국가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저의를 의심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정치인들은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국가는 국민이 국가를 호출하는 노래여야지 그 반대일 수는 없다. 애국가가 진정 ‘나라 사랑하는 노래’라면 국가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더욱 애절하게 불릴 것이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탄식 속에서도 한국의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국제시장> 국기 하강식 장면의 기억이 새겨진 애국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각인된 그 노래를 진도 앞바다를 향해서 차마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최유준 | 전남대 HK교수·음악학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