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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2012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가 끝났다. 이제 상위 네 팀의 가을야구가 시작된다. 일컬어 ‘가을 잔치’라던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잔치에 가보면 모두들 덕담을 나눈다. 신랑은 훤칠하고 신부는 참하고, 뭐 그런 얘기 말이다. 그러나 속으로 걱정이 없는 게 아니다.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이나 신랑·신부의 지인이라면 이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하하되 한두 가지 걱정과 근심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올해 시즌을 돌아본다.


700만 관중 돌파부터 생각해보자. 정규시즌 총관중 715만6157명. 대기록이다. 2006년 304만명, 2008년 525만명, 2010년 592만명 등 해마다 100만명을 추가하는 기록을 세운 프로야구는 지난해 681만명을 기록하며 꿈의 700만명을 예고했는데, 불과 1년 만에 715만명으로 프로 스포츠 최대의 흥행을 기록했다.



(경향신문DB)


 몇 가지 이유가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등 눈부신 외적 성취로 확인되듯이 한국 야구가 일정하게 성장한 것이 관중 증가의 원동력이다. 각 구단이 팬을 중심으로 한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친 것도 중요하다. 야구장에 가보면 해가 지기 전부터 몰려든 관중과 이를 맞이한 팀의 선수들과 프런트에 의하여 야구장은 일찌감치 이 헛헛한 대도시의 오아시스로 변해 있다. 한국 야구만의 독특한 열정과 광기의 스탠드에서는 누구도 홀로 외로이 앉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종합 스포츠 채널이면서도 사실상 ‘야구 전문 방송’이 되다시피 한 케이블 방송의 중계 수준이 향상된 점도 있다.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 일시적인 휴지부가 많다. 투수와 타자의 일구일타, 적시타 이후의 숨가쁜 작전 상황, 스리아웃 이후의 공수교대 등 이렇게 전술상의 휴지부가 발생했을 때 경기장 곳곳에 포진한 중계 카메라는 여러 각도에서 선수와 감독을 클로즈업한다. 긴장해 있거나 환호하는 관중까지 포착한다. 연출자는 이 모든 장면을 단순히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고 드라마화, 스펙터클화, 캐릭터화한다. 이 순간, 야구에 관심이 없던 시청자도 투수의 땀방울과 감독의 검은 선글라스와 관중의 간절한 기도에 감정을 몰입한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반기는 넥센이 분위기를 이끌었고 후반기는 롯데가 가을야구로 직진했으며 박찬호, 이승엽, 김태균, 김병현 등의 해외파와 더불어 류현진이나 오승환이 강력한 티켓파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덕담은 이 정도로 줄이자. 냉정하게 말하여 올 시즌 프로야구가 700만이라는 숫자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야구를 보여줬는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올해는 그 어느 시즌보다 실수가 많았다. 기록상의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경기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수 말이다. 실수로 인하여 경기 흐름이 바뀌고 승패에도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실수가 자주 눈에 띄는 시즌이었다. 


거꾸로 말하여 ‘명승부’라고 부를 만한 경기도 드물었다. 물론 지난 8월의 경기들은 무더위와 장대비와 올림픽이라는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았다. 2위에서 4위까지 순위가 경기 하나로 뒤바뀌는 상황에서 피 말리는 한 점 차 승부나 통렬한 끝내기 홈런은 한국 야구의 일정한 수준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실수가 많았고 이를 만회하려는 팽팽한 긴장의 밀도는 예년에 비하여 옅어졌다.


실수가 많다는 것은 팀마다 고유했던 개성이나 색채가 옅어진 것과 비례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30여년의 역사를 써오는 과정에서 각 구단은 저마다의 지역성이나 선수층이나 역대 감독의 이력에 의하여 독특한 개성을 유지해왔다. 그랬던 것이 올해는 전체적으로 흐려졌다. 비범한 식견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공 하나에 생의 전체를 거는 듯한 ‘작전 야구’가 8개 구단 전체에 걸쳐 전반적으로 무난한 스타일로 마모되었다. 서로 다른 철학과 개성이 용접기계의 스파크처럼 충돌하는 승부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경기를 유지하려는 흐름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각 팀 감독의 일반적인 스타일에 더하여 그야말로 파리 목숨으로 불리는 불안한 위상도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즌 도중에 두 명의 감독이 경질되었다. 선수나 감독이 저마다의 실력과 철학으로 야구장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저 본부석 상단의 구단주를 의식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라고 한다면, 야심만만한 도전과 실험은 실종되고 만다.


내 작업실 근처에는 식당이 몇 군데 없다. 그나마도 이렇다 할 맛은 없는, 그저 그런 식당이다. 그중 한 군데를 자주 간다. 친절하고 깨끗한 식당이지만 맛은 신통치 않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서 갈 뿐이다. 혹시 프로야구 700만 관중 돌파도 이런 맥락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먹고살 만한 사회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다채로운 여가문화나 그 시간, 그 콘텐츠가 충분한 사회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야구가 마땅히 즐길 게 없는 관중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롯데와 두산의 준플레이오프로 가을 야구가 시작되었다. 페넌트레이스보다는 훨씬 더 예리하고 감각적이며 야구의 모든 요소가 중층적으로 결합된 작전의 야구가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마침 한화의 새 사령탑으로 김응용 감독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700만 시대에 걸맞은 수준 높은 새 시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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