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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헌익과 정병호가 함께 쓴 <극장국가 북한>은, 두 사람의 전공이 ‘인류학’이라는 점에서, 그 학문적 방법론의 신선함이 돋보이는 저작이다. 북한은 참여 관찰이라는 인류학의 고전적인 방법론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다. 북한의 내부로 들어가서 ‘참여 관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두 사람은, 클리퍼드 기어츠의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적극 활용하여 북한 정권이 대외적으로 공개하고 과시하는 ‘연출’된 장면들과 서사들을 분석한다.

특히 두 사람은 김정일 시대에 그들이 혁명가극 <피바다>나 <꽃 파는 처녀> 그리고 ‘아리랑 대축전’을 국가사업으로 전개하고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혁명열사릉이나 주체탑 등을 축조하여 북한 전역을 거대한 극장으로 구성해 나가는 맥락을 살펴, 북한이 이 과시적인 스펙터클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어떤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의 강력한 돌파 의지를 보여왔는가를 분석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북한의 역대 정권이 대내적으로 강력한 통제장치를 구사하고 대외적으로 핵 위기를 주도하여 권력을 유지해왔다는 통념은, 두 학자에 의하면, 부분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안팎으로 강력한 통제나 군사적 위협으로 ‘겨우’ 유지되어온 정권이 아니라, 과시적인 스펙터클 문화 정치의 정교하면서도 지속적인 전략에 의해 북한은 문화적으로 건재해온 것이다. 특히 1995년 이후 북한 정권이 강력하게 천명했던 ‘백두혈통의 선군정치’는 김정은 정권으로까지 이어지는 스펙터클 정치의 요체였다. 북한 사회 전체가 극장이 되고 최고 권력자가 주연 배우가 된다. 북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는 열렬한 관객이 되며 때로는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어 스펙터클에 참가한다.

이 책에서는 깊이 다루지 않았지만, 북한은 사실 또 하나의 스펙터클, 즉 스포츠를 통한 문화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1년 5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의 단일팀(코리아) 구성이다. 이때 단일팀은 남북한이 사이좋게 동수로 하는 식의 비스포츠적인 발상 대신 엄격하게 1, 2차 선발전을 치러 구성했다. 그 덕분에 본선 8강까지 진출했다. 남북한 스포츠 교류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 단일팀 구성은 그해 12월13일 서울에서 타결된 ‘남북 기본합의서’의 전조였다. 남북한의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담은 이 합의문은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함께 한반도 평화의 기본적인 정신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북한은 ‘남북 기본합의서’라는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영화를 개봉하기 전에 ‘단일팀’이라는 예고편부터 띄운 것이었다.

김일성 사망과 그 이후 권력 조정 과정에서도 북한은 스포츠 교류라는 예고편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북한 전역을 강타한 기근과 핵 문제에 따른 외교 고립 상태 등에도 불구하고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와 2005년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에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김정은을 제외하고 나면 사실상 북한이라는 극장의 최고 배우인 김양건·황병서·최룡해가 과감하게 ‘출연’하기도 했다.

남북한 스포츠 교류가 아직까지는 ‘이벤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남북한 선수가 ‘동시 입장’을 하는 최소 단위에서 아예 단일팀까지 구성하는 최대 단위까지의 교류가 여전히 스포츠 외적인 이벤트 혹은 일회적인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늘 북한이 연출하는 스포츠라는 ‘영화’는 그 줄거리가 무엇이며 누가 주연 배우로 출연하는지, 그리고 연출 의도는 무엇인지 정밀하게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강공 일변도였던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과 트럼프 정부의 등장이라는 국면에서 그들은 아예 스포츠 이벤트 자체를 개봉하지 않는 방식으로, 조심스러운 연출을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한 스포츠 교류를 천명했다. 지난 6월24일 전북 무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을 찾은 문 대통령은 내빈석의 본인 좌석을 지나쳐 북한의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게 다가가 환영 인사를 했다. 공식 환영사를 통해서도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단 및 응원단이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이에 장웅 위원은 박수를 치는 정도로 제한적인 연기를 했다. 분명한 말로 이에 화답하거나 어떤 조건부의 답례도 하지 않았다. 아직 북한은 스포츠 영화의 본격적인 ‘남북한 공동 제작’에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와 협력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바흐 위원장은 “평창조직위가 성공적인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조연들도 아직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전개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합작하여 공동 제작하게 될 이 영화가 탄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개봉 시기는 정해졌다. 내년 2월, 평창이다. 제작자도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의 얼개도 짜여 있다. 그러나 영화의 핵심은 내용이다. 스포츠 그 자체가 존중되어야 하며 선수들이 표면적으로라도 주인공이어야 한다. ‘한반도기’를 함께 흔드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던 것은 남북 기본합의서 이후의 1990년대 일이다. 스포츠 자체의 내실 있는 교류, 선수와 지도자들의 왕래, 수준 있는 경기의 감각적인 충만 등이 절대적이다. 일회적인 퍼포먼스로는 ‘동북아 평화’가 요원하다. 스포츠에 내재된 비적대적인 경쟁의 신선한 감각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될 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미묘하면서도 경이로운 정서들이 자주 확인되고 두루 확산될 때, 남북한 공동 제작의 스포츠 극장은 만원사례의 풍경이 될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 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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