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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2015년 8월, 어느 방송국의 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 있다. 스포츠 ‘전문’이라고 했지만, 정보와 분석을 대중적으로 재미있게 전달하는 교양 프로그램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예능’적인 요소도 없지 않았다.

그 방송사 소속의 전문 아나운서와 여성 연예인이 진행을 맡았는데, 녹화 시작하면서 ‘마스코트’라는 말이 나왔다. 나를 포함하여 몇몇 출연자를 소개한 후 고정으로 출연하는 그 여성 연예인을 가리켜 ‘이 프로그램의 마스코트’라고 말한 것이다.

일단 녹화가 진행되다가 다른 이유로 잠깐 중단이 되길래 나는 웃으면서 “아까, 그 마스코트라는 말 요즘 안 쓰는데, 자칫 오해 받아요”라고 말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다행히 남성 아나운서는 낡고 닳은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30대 이상 남성들은, 나를 포함하여, 누군가가, 더욱이 잘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자르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일단 불쾌하게 여기고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들여져 왔고 그렇게 살아왔다. 게다가 그는 아나운서, 즉 가장 정제되고 바른말을 구사하는 직업의 소유자 아닌가. 그럼에도 불쾌해 하기는커녕 ‘왜 그러냐’고 진지하게 되물었다.

함께 출연했던 다른 사람이 서로를 어색하지 않게 설명을 잘해줬다. 여성이, 그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로 소개되기보다는 외모나 성적 이미지로 소개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그 사람은 짧지만 명확하게, 게다가 유머까지 섞어가면서, 정확하게 말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더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그 아나운서는 그 여성 연예인을, ‘미모의 젊은 여성 연예인’이 아니라 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을 능숙하고도 활기차게 진행하는 동료 전문가로 존중하며 진행을 했다.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칫 어색하고 불편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 적절히 개입하되, 어쨌든 방송 녹화는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짤막하지만 정확하게, 게다가 어느 누구도 불쾌해 하지 않을 유머를 정확하게 구사했던 그 사람. 김남훈, 레슬러 김남훈.

그는 2000년에 프로 레슬링 세계에 입문했고 수많은 경기를 치렀으며 2005년에는 연습 도중에 큰 부상을 입어 지금도 다소 불편한 자세로 걷는다. 2008년부터는 이종격투기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한국과 일본의 링 위에 자주 올라간다. 김남훈의 경기는 링 위에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 링 밖에서 그는 더 많이 싸웠다. 제주도 강정, 평택 쌍용자동차, 부산 한진중공업, 진도 팽목항 등으로 그는 달려갔다.

그러나 내가, 김남훈의 사회 참여 이력을 나열하고, 그러니까 스포츠 선수들도 이렇게 사회 참여를 해야 한다고 단선적인 구호를 외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저마다의 선택, 저마다의 결단일 때 의미 있다. 나는 지금 김남훈의 말하는 방식, 그것이 아름답게 결빙된, 그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실은, 지금 나는 고등학교 체육 교과서를 분석하다가, 잠시 쉬는 중에, 소셜미디어를 하다가 김남훈의 글을 읽게 되었고, 순식간에 빠져들었다가 그가 그동안 쓴 여러 글들을 찾아 읽고 있는 참이다. 그중에 어떤 것은 몇 해 전에 읽기도 했는데, 다시 보니, 그는 말도 잘하지만 글을 더 잘 쓴다. 번지르르한 말에 그럴듯한 묘사를 잘한다는 게 아니다.

그의 말에는 땀이 배어 있고 그의 글에는 피도 묻어 있다. 살아온 과정들, 살아낸 아픔들, 살면서 겪은 비틀린 심정과 일그러진 마음이 그의 말과 글에서 배어나온다. 마치 급하게 틀어막은 수건으로 스며드는 핏자국처럼, 그의 말과 글은, 그래서 아프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멍이 들고 핏자국도 비치는, 자신의 경험들을 상당히 객관화하여 쓴다는 점이다. 게다가 독특한 블랙 유머까지 구사하기 때문에 어떤 대목에서는 <키즈 리턴>이나 <소나티네>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연상된다. ‘마스코트’에 대한 그의 절제되었으면서도 유머 있는 설명은 이런 쓰라린 체험의 결과다.

다시, 고등학교 체육 교과서를 읽는다. ‘교과서’답게, 스포츠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들이 나온다. 인내, 희생, 협동심, 성취감 같은 말로 가득 차 있다. 프로 레슬러 김남훈의 기록이 체육 ‘교과서’에 수록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로 레슬링이나 이종격투기에 대한 주류 스포츠 학계의 저평가도 있거니와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김남훈의 땀에 전 말과 피묻은 글은 일반적인 스포츠 교과서의 ‘인내, 협동, 인성’ 같은 교훈과 달리 처절한 밑바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남훈의 글을 읽는다. 그가 치른 링 위의 혈전들이 보인다. 그와 맞싸웠던 링 위의 거친 삶들이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스포츠는 그런 세계일지도 모른다. 도교대 명예교수 강상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이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는 절망감, 증오, 거절당한 느낌, 허무의 심연”이 김남훈의 링이었다. 강상중은 그런 세계에서 ‘악’이 싹튼다고 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러의 6번 교향곡에 대하여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그런 처절한 절망의 세계는 오히려 모든 허위의 약속을 거절하는 힘을 낳기도 한다.

나는, 격투기가 되었든 야구가 되었든 등반이 되었든,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올라간 우리의 스포츠 스타들이 ‘하면 된다’거나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식의 언론이 원하고 팬이 원하는 판에 박힌 말 대신, 저마다의 가슴에 맺혀 있는 진심으로 고통스럽고, 바로 그렇게 때문에, 진실로 위엄 있는 말들을 들려주기 원한다.

그것을 어떻게? 그렇다면 김남훈의 글을 찾아 읽기 바란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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