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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터미네이터2>의 첫 장면. 202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폐허가 된 놀이터가 보인다. 아이들이 타고 놀던 미끄럼틀이나 세발자전거는 잔혹하게 일그러져 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화면 밖에서 씨익 웃으며, 폐허의 놀이터에서 공허하게 흔들리는 철제 시소의 마찰음을 들려준다. 곧이어 기계 병사가 인간의 해골을 짓밟으며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다. 2029년이 영화의 배경이다. 고작 13년밖에 남지 않았다.
화성 탐사용 기계인간의 복수가 펼쳐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이 시간적 배경이다, 3년 남았다. 우주선을 통제하는 슈퍼 컴퓨터가 반란을 일으키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2001년, 벌써 과거가 되었다.
모든 뛰어난 작품이 그렇듯이, 예술은 <칼의 노래>(김훈)처럼 과거를 다루든 <로드>(코맥 매카시)처럼 근미래를 다루든, 지금 이 순간, 오늘의 우리 삶에 대한 전언이다. 앞서 언급한 SF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버트 하인라인의 신체 강탈이나 필립 K 딕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은 20세기 초강대국의 문명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상력이다.
‘알파고’ 또한 그러하다. 오는 3월9일부터 15일까지, 인간계 최고수 이세돌 9단에게 맞서는 구글의 인공지능(AI) 말이다. 유럽 바둑 챔피언 판후이 2단을 꺾은 알파고는 이 9단에게 한두 번 지더라도 그 과정의 복합성과 경우의 수를 모조리 계산해 더욱 강성해진 모습으로 도전하는 딥러닝 기술을 갖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배우면서 동시에 뛰어넘는다는 얘기다.
이러한 일차적인 감각 반응은 묵시록적 예언이다. 언젠가는 인간의 피조물이 스스로 타락천사가 되어 바벨탑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 파국은 얼마 남지 않았고, 필멸은 인간의 운명이 되고 마는가?
사실 이런 상상력이란 아주 건강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합적으로는 강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약한 인간은 인류의 시원에서부터 이 같은 상상력의 드라마를 써왔다. 소포클레스는 제 눈을 훼손하며 성 밖으로 걸어나가는 오이디푸스를 통해 무한한 권능과 명예에 자만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다수의 공학자들은 산업혁명의 기계들이나 20세기 모더니즘의 자동차가 그렇듯이 알파고 같은 기계도 결국 새로운 산업이자 인간의 확장된 능력이며, 심지어는 예술적 상상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금 우리 손에 탑재된 스마트폰처럼 말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전이 시사하는 바 역시 그러하다. 인간의 능력이 무한해 결국 기계를 잘 활용할 것이라는 상식 수준의 낙관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9단이 알파고를 물리쳤다 해서 과도하게 환호할 일도 아니며, 설령 졌다 해도 그게 무슨 문명의 불안과 위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둘은 이분법의 적대자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19세기 이후 근대 스포츠는 이 모더니즘의 화두, 곧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풀어왔다. 1878년 처음 도입된 심판의 호각 소리를 시작으로 각종 스포츠용품과 스포츠과학이 인간 능력을 극대화했고, 오늘날에는 첨단 소재 유니폼이나 골라인 판독기술 ‘호크아이’가 인간이 벌이는 초월적 욕망의 중요한 보조재로 쓰이고 있다.
녹내장 수술 후 국제축구연맹(FIFA)의 허가를 얻어 고글을 쓰고 뛴 에드가 다비즈, 무려 12년 가까이 첼시에서 뛰는 바람에 아스널로 이적한 후에도 습관처럼 첼시 라커룸에 들어갈 뻔했던 체흐 골키퍼의 헤드기어는 그 선수들의 상징으로 통한다. 아마 지금도 어떤 선수는 콘택트 렌즈를 끼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무릎에 철심을 박아넣기도 했을 것이다.
의지의 화신에서 살인범으로 추락한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를 기억해보자. 피스토리우스는 2008년 1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의 판단에 따라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은 물론 런던 올림픽 때 남아공 1600m 계주팀 명단에 올랐다.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해 400m에서 준결승까지 올랐다.
한편 지난 4일, 독일의 장애인 멀리뛰기 선수 마르쿠스 렘이 8월의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겠다고 선언했다. 15살 때 오른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고 탄소섬유 의족을 착용한 렘의 기록은 최고 8.40m. 20년째 깨지지 않고 있는 마이클 파웰의 1991년 기록 8.95m에는 못 미치지만 그렉 러더퍼드의 런던 올림픽 금메달 기록(8.31m)보다 뛰어나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렘 선수의 의족 탄성이 기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이 논란은 2019년이나 2029년의 스포츠, 나아가 인류의 물질적 삶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신체적 능력 및 그 상상력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근미래에 부상으로 은퇴했던 선수가 터미네이터처럼 티타늄 합금 수술을 받고 복귀할 때, 그의 콘택트 렌즈는 허용하면서 그 다리는 불허할 것인가,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한 진공의 답은 없다. 당대 삶의 조건과 문명적 성찰 속에서 인간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제출된 수많은 답변 중에서 당대의 인류가 승인할 수 있는 것을 채택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근미래의 파국을 다룬 소설 <로드>에서 매카시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계속 걸었다. 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죽은 세계를 밟고 나아갔다.’ 알파고는 지금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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