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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하겠다고 발표를 했지만 막막하더라고요. 구단에 유니폼을 반납하고 나오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어느 무명 선수의 절박함인가. 그렇지 않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2010년 9월 은퇴한 양준혁 선수의 말이다. 작년 8월, 어느 방송에서 양준혁은 이렇게 덧붙였다. “맨날 야구장에 가고 그랬는데, 이젠 뭘 해야 되는지 막막하고 계속 쉬어야 되는데 어떻게 쉬냐 이 말이죠.”

양준혁 선수의 이 말은 실제로 먹고살기 막막하다기보다는 더 이상 현역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된 노장 선수의 회한에 가깝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넉넉한 연봉을 받았고 본인의 의지에 따라 야구와 관련된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은 된다. 그럼에도 말 못할 답답함과 회한에 사무치는데 여느 선수들이라면, 무명 선수라면 이 감정이 매우 싸늘한 현실과 직면할 것이다.

어느 분야든 정년이 있고 은퇴가 있다. 때가 되면 후진들에게 길을 터주고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이 사회가 은퇴자까지 받아줄 만큼 넉넉지는 않다. 선수들은 더 절박하다. 사회 일반의 정년이나 은퇴 상황을 적용할 수가 없다. 30대 중반이면 대개들 은퇴한다. 체조나 수영은 20대 초반을 최전성기로 잡고 그 이후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프로 스포츠의 스타라면 이 나이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삶이란 돈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운동장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운동장 바깥의 규칙과 태도와 관계들에 대해 서툰 경우가 많다. 경험 있는 은퇴자들이 씁쓸하게 말한다. 제일 먼저 다가와 친절하게 웃으며 뭐라도 해보자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이다.

무명 선수들은 사기를 당할 기회가 없다는 점에 안도해야 할까.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선수들 가운데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선수는 0.04%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사회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저임금의 지도자 자리조차 귀하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따로 돈을 마련해야 하고 겨우 마련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폭력적인 위계질서의 행동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도 몇 가지 제도가 구비되었고 인식도 개선되고 있다. 대한체육회는 은퇴 선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인천 전자랜드 농구단에서 코치를 지냈던 이환우씨는 은퇴 선수들을 위해 비영리 사단법인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다. 누구라도 은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은퇴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그 시기가 빨리 올 수 있으며 부상이나 슬럼프로 인해 갑자기 닥쳐올 수 있다는 점을 운동에 관여하는 사람 모두가 철저히 인식해야만 한다. 아프면 쉬게 해야 하고 부상을 입었으면 치료를 하고 재활을 시켜야 한다. 악으로 깡으로 할 일이 아니다.



운동을 시작하는 중·고교 시절부터 은퇴에 대한 준비를 더불어 해야 한다. 이제 막 운동 시작했는데 벌써 은퇴 걱정이냐고 핀잔하는 사람도 있겠는데, 바로 그게 문제다. 선수들에게 은퇴는 내일이라도 당장 닥칠 문제다. 그렇지 않다 해도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기 전에, 사회로 방출되는 현실 아닌가.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가 운영하는 유스 프로그램이 좋은 예다. 우리의 이승우나 장결희 같은 유망주가 뛰고 있는데, 그들이 그곳에서 겪은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훈련 시간은 너무 적고 공부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초·중·고 과정에서 유급하면 프로 진출이 더뎌지거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 아니 공부한다. 복잡한 일정 때문에 수업을 듣지 못하면 교사들이 반드시 보충수업을 한다. 다른 나라의 다른 팀으로 잠시 임대를 간 선수들도 인터넷 수업을 통해서라도 필수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중등교육은 물론이고 대학에 진학하는 선수들까지 뒷받침해준다. 유스 출신으로 1군에까지 진출한 세르지 로베르토 선수는 바르셀로나 지역의 명문 라몬룰대학교의 경영대학에 다닌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선수들은 언제든지 은퇴할 수 있다. 부상 때문에 일찍 하는 수도 있고 서른 넘어 은퇴할 수도 있다. 그 이후 기나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유소년기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류의 지식을 공부함으로써 선수의 지적, 감성적, 심리적 능력이 풍부해지고 이로써 경기력도 향상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공부를 병행함으로써 은퇴한 뒤에도 축구 행정, 산업, 지도 등의 여러 방면에서 활동할 수가 있다.

물론 은퇴 후 1년 동안 지속적으로 정보 제공과 상담을 통해 사회화 과정을 지원하는 호주의 ‘에이스 프로그램’이나 일본 J리그의 경력 지원 센터 같은 게 당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중·고교 시절부터, 인생 전체를 함께 구상하고 준비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자는 것이다. 공부를 시키자는 것은, 부상당하면 다른 직업을 알아볼 수 있게 하자는 방어적 개념이 아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이들의 심리적 능력이 담대해지고 경기력도 향상된다. 더불어 인생의 다양한 기회를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즐겁게 운동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실질적인 은퇴 프로그램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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