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아, 한라산에 가고 싶다, 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결혼 20년차에 들어서 아내의 얼굴을 감히 정면으로 마주 본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기억상실 장치로 날카로운 복수가 펼쳐지는 드라마를 보면서 아내가 시큰둥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처절한 복수극 <애인 있어요>의 대사와 ‘아, 한라산에 가고 싶다’는 말이 기묘하게 겹쳐지면서, 나는 한번은 가긴 가야 되겠구나, 다짐했다.
깊은 산 암자에서 수행하는 고승을 몇 번이고 찾아가 한 말씀이라도 얻어들으려는 어리석은 중생처럼, 그 아득한 산정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 말 한마디, 나는 정녕 듣고 싶다. 몇 번 듣기는 하였으되, 그것은 썩 진솔하지 않아 보였다. 연거푸 고산 등정을 한 사람들은 ‘인내’ ‘동료애’를 흔히 말한다. 틀린 얘기들은 아니지만,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의 경지에는 맞지 않는다.
스위스 알프스 엥가딘의 질스-마리아. 철학자 니체는 해발 1800m의 이 고지대 마을에서 8년을 살았다.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 등을 이곳에서 썼다. 병약한 니체였지만 해발 3451m의 코바치봉을 비롯해 여러 산들을 오르면서 니체는 자신의 사유를 얼음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니체는 “보다 높은 곳의 보다 희박한 공기에, 그리고 겨울여행과 얼음과 산”에 의하여 차디차게 응결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다.
비록 그런 경지는 아니더라도 ‘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한다’거나 ‘한국인의 기상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는 얘기 말고 다른 말들, 그 자신의 내면에 웅크린 소리, 그 높은 산이 들려준 비의, 그 아득한 산정에서 느낀 바람의 결, 극한의 세계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한한 고독과 비장하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 그런 말들을 나는 꼭 듣고 싶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한 번 갔던 산은, 차마 등정하지 못했어도,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일본의 여성 산악인 다니구치 게이. 여성 최초로 황금피켈상을 받았지만 후원업체 없이 최소한의 조건으로 등반을 해왔다. 후원사의 협찬이 오히려 등반의 짐이 된다는 이유였다. “산의 작은 것 하나라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적은 인원으로 짐꾼이나 가이드의 도움 없이, 등정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지난 22일, 다니구치는 홋카이도 다이세쓰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산을 경외하되, 그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더욱 존경했던 나로서는 다니구치 같은 사람의 부고를 접하고서야 그들이 몸으로 말했던 것을 뒤늦게야 듣는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몸으로 말을 해왔고 어리석은 나는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니, 한 해를 보내는 마당이라 2015년은 포기하되 새해의 첫머리에 기필코 한라산에는 가보아야 하겠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주제별 > 스포츠와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윤수의 오프사이드]반상의 ‘알파고’,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다 (1) | 2016.02.22 |
---|---|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신영복 선생과 ‘더불어 축구’의 추억 (0) | 2016.01.18 |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은퇴에 대처하는 선수들의 자세 (0) | 2015.12.07 |
[여적] 서말구와 10초34 (0) | 2015.11.30 |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성적 지상주의와 운동부의 ‘폭력 구조’ (0) | 201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