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뿌리내리다’라는 표현이 있다. ‘뿌리 뽑히다’라는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이 식물학의 용어만이 아님을 근현대사 100여년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박경리의 <토지>는 구한말의 ‘뿌리 뽑힌’ 사람들 얘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기나긴 장강대하의 첫머리는 1897년 추석이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는 한가위 풍경으로 시작하는데, 말하자면 오랫동안 한마을에 ‘뿌리내리고’ 사는 풍경이다.
그러다가 나라도 잃고 땅도 잃어 북간도로 이주한다. 그곳에 ‘뿌리내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평생 호미 한번 잡은 일 없는 김훈장도 북간도 메마른 땅에 엎드린다. 김훈장을, 음풍농월하는 선비로 내심 타박하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적신다. 아무리 망국의 유민 신세라 해도, 한 사람 정도는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천 따지’를 해야 사람 사는 형색인데, 김훈장마저 호미를 집었으니 모두가 ‘뿌리 뽑힌’ 신세가 아닌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황석영, 윤흥길, 조세희 등이 산업화 시대의 ‘뿌리 뽑힌’ 사람들을 묘사했음은 이제 교과서에 등재되었을 만큼 ‘역사’가 되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그 마지막에 이르러, 기차가 도착했음에도 정씨와 영달이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들은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런 풍경은 다 사라졌는가. 글쎄,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불빛들 뒤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온통 원룸이고 고시원이다. 황석영이나 조세희 이후로 그런 소설이 사라질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박민규와 김애란과 편혜영의 소설들은 이 거대 도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를 다루고 있다. 다달이 ‘500에 30’을 겨우 내면서 뿌리 뽑힌 채 살아가는 삶 말이다.
박민규는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이렇게 썼다. “가족들은 흩어졌다. 부모님은 시골을, 형은 막노동판을, 나는 나대로 친구의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시원에 가게 된다. 짐을 나르던 친구가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고 속삭이자 주인공은 강렬한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
그러니까 ‘뿌리’란 관계다. 뿌리내린다는 것은 실핏줄 같은 삶의 관계를 이룬다는 뜻이다.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그 관계가 끊어짐을 뜻한다. 답답하거나 속상하거나 외로울 때, 문자 보낼 사람 없고 목소리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 지독한 외로움! 그것이 ‘뿌리 뽑힌’ 삶이다.
진천선수촌에 가보았다. 선수촌 시설을 둘러보고 신치용 선수촌장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와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전체적으로 시설은 웅장하였고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사항 또한 섬세하게 잘 구성되어 있었다. 신치용 선수촌장을 비롯한 행정 관계자들의 자상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도자와 선수들이, 선수촌장이 동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현실적 고충과 개선 사항을 활달하게 개진하는 모습에서, 예전의 생활 문화와 많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월 초에 취임한 신치용 선수촌장이 예전의 훈육시설과는 달리 선수촌을 좀 더 활기차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하나둘씩 실천되는 양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운동하는 기계’라든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동떨어져서’ 같은 말도 현장을 방문한 혁신위원들이 아니라 선수촌의 지도자와 선수들이 스스로 토로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가 새로운 문화로 변모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매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근사한 선수 전용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느 선수가 얘기했다. 따지고 보면 이 정도의 국제적인 시설에 매점 하나 없을까 싶고 또 매점이 당장 급한 시설인가도 싶지만, 실은 이 작은 요청 하나가 우리 선수들의 장래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매점이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며 매점을 동심원으로 하여 선수촌의 지도자와 선수들이 흩어졌다가 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매점은, 하루 종일 땀 흘리며 훈련한 지도자와 선수들이 순간적이나마 정겹고 소박하게 ‘관계’를 맺는 공간이 된다.
어디 매점뿐이겠는가. 국가가 이른바 ‘국위선양’을 목표로 각 종목의 가장 우수한 선수들을 한 장소에 모아서 훈련을 시킨다고 했으면 그것은 당연히 그들의 삶의 뿌리가 아름답게 내려지도록 해야 한다. 국가가 국가의 목표를 위한다고 해서 가족이 있고 생활이 있고 관계가 있는 지도자들의 현재적 삶의 뿌리를 뽑아서는 안된다. 어쩌면 22세기를 볼 수도 있을 어린 선수들의 미래를 뿌리째 흔들어서도 안된다. 외로울 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답답할 때 언제든 부모님을 만나 어리광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종목 선수들이나 다른 분야로 진출한 친구들과도 어울려야 한다. 관계가 곧 뿌리다.
그러니 혁신이 필요하다. 웅장하고 세련된 시설은 제대로 갖췄다. 이제 첨단의 스포츠 과학으로 선수들을 가르치고 진실로 인간적인 관계로 선수촌 생활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선수촌의 모든 관계자들 또한 그와 같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어느 관계자의 말처럼 지금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미묘한 상황이지만, 지도자의 삶의 뿌리가 유지되고 어린 선수들의 다양한 삶의 관계, 곧 뿌리가 넓게 내려지는, 그야말로 최고 선수들이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폭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중 받으며 ‘뿌리내리고’ 살아가게 해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주제별 > 스포츠와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스포츠 혁신이 엘리트 살리기다 (0) | 2019.05.28 |
---|---|
[기자칼럼]간성 선수가 연 ‘판도라의 상자’ (0) | 2019.05.07 |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스포츠를 통하여’ 사회를 혁신하자 (0) | 2019.04.02 |
[기자칼럼]‘역전 앞’ 야구장 (0) | 2019.03.26 |
[기자칼럼]선수촌, 감기약, 미셸 푸코 (0) | 2019.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