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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열사의 시대였다.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 숱한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조사실에서, 외딴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죽어갔다. 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의 나이는 23세였다. 그해 6월 거리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나이는 21세였다. 88년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한 박래전의 나이는 25세였고, 89년 여수 거문도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이내창의 나이는 27세였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서울지검 형사2부 검사로 있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차 수사에 참여했다. 임관 4년차이던 박 후보자는 수사팀의 막내 검사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수사는 엉망이었다.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수사가 아니라 덮는 수사였다. 검찰의 공소장은 2명의 경찰관이 고문에 가담했다는 경찰의 조작된 결론을 그대로 따랐다.

박 후보자가 당시 작성한 조서를 읽다 보면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최초 허위보고서를 누가 작성토록 지시했는지 추궁한 흔적이 없다. 범행의 알리바이를 둘러싼 엇갈린 진술이 나오는데도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조서는 기계적인 문답의 지루한 나열일 뿐이다. 바늘 틈새만 한 허점이라도 파고들어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집요함이 보이지 않는다. 전문적 수사기법은 고사하고 일반인의 상식적 추궁에도 못 미친다. 박 후보자가 봐주기 수사, 부실 수사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박 후보자보다 어린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절이다. 범죄가 있으면 혐의를 밝혀내 법대로 처벌받게 하는 것이 검사의 의무다. 막내 검사라고 예외가 아니다. 실체적 진실에 눈을 감고 상사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는 검사가 좋은 검사라고 가르치는 법학 교과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부당한 압력이나 지시에 맞서고, 정 안되면 옷이라도 벗는 게 검사의 직업윤리이자 최소한의 시민적 양심이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그렇다.

드물지만 한국 검찰사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1964년 1차 인혁당 수사 때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3명은 공소제기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과장하고 압력을 행사한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가까운 예로는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의 악전고투를 들 수 있다.

독일의 사례는 더욱 인상적이다. 히틀러 집권 이듬해인 1933년 6월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프리틀바흐 지역 담당검사 조지프 하르팅거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4명을 사살한 혐의로 수용소장과 나치 친위대원 3명을 기소했다. 서슬 퍼런 나치 권력을 단죄한 그는 기소 당일 부인에게 “내가 스스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민가협, 박종철기념사업회, 민변 등 사회단체 회원들이 4일 서울 종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임명 동의 철회를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박 후보자의 대법관 임명은 단지 대법관 한 명을 새로 뽑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문제이다. 불의의 시대에 공직자는, 법률가는, 검사는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신호다. 검사가 권력과 타협해도 되는지, 법률가가 법의 논리보다 권력의 의중을 따라도 되는지, 공직자가 사회의 공익보다 정권의 사익에 충실해도 되는지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작업이다. 최고 법관에 대한 불신이 사법부와 사법체계 전반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인 법치주의에 이것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이번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보다 엄정하고 치열한 검증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검찰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기록 전체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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