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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경계선 문제는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문제도 국민의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민주정치의 기초라고 한다면 간단히 넘겨 버릴 수 없는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른 모든 국정의 과제들을 제치고 정치의 복판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정국 경색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소속 집단이 요구하는 집단행동과 이념과 구호의 광장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도 궁극적으로는 체험-개인적이기도 하고 집단적이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이 쉽게 잊히고 만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의 죽음과 그를 사살한 조지 짐머먼에 대한 공판의 결과는 미국 사회에서 흑백 갈등을 재연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공판이 끝난 직후인 지난달 19일에 그의 소견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그 나름으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짧으면서도 정치와 법에 대한 일정한 견해, 그리고 구체적인 체험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담고 있는 폭넓은 담론이었다. 미국의 국내 문제가 우리에게 큰 관심거리가 될 수는 없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이 우리의 정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 않나 싶다.


이미 국내 신문들에서도 보도한 바 있지만, 사건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작년 2월26일 밤 플로리다주 샌퍼드의 한 동네-경비가 있고 출입이 통제되는-에서 편의점에 들러 일용품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17세의 흑인 고등학생 트레이본 마틴을 백인 방범 자원봉사단원 조지 짐머먼(29)이 사살하였다. 그의 말로는 수상하게 보이는 마틴을 자동차로 따라가다가 다시 차에서 내려 뒤를 쫓아가 조사하려는데 반항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총을 발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이 나기 전 짐머먼으로부터 수상한 사람을 추적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이 달려왔을 때 마틴은 이미 총에 맞아 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짐머먼은 그 자리에서 검거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방면되었다. 그리고 40일 이후에 구속되었지만, 이번에 무죄 판결로 자유인이 되었다. 무죄가 된 이유는 살인 의사를 입증하기가 어렵고 정당방위의 동기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레이본 마틴(왼쪽)·조지 짐머먼 (AP연합)


인종주의적 판결이라고 규탄하는 소리가 미국 전역에서 높아지고 도처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백악관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큰 정치 문제가 되어가는 이 사건에 대하여, 특히 흑인 대통령으로서 발언이 없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백악관의 기자실에 나와서 직접 손으로 썼다는 원고를 대본으로 하여 그 소감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일단 비판과 시위 운동에 공감을 표하였다. 그것은 폭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그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플로리다의 재판은 판사나 검사 직책의 요구대로 진행되었고, 판사가 배심원들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하여 평결(評決)하게 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판결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의 입장은 법 절차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군중 시위의 정당성도 지지하는 양의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의 발언은 실정법과 정의가 서로 어긋날 때, 그것을 다같이 옹호하여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을 교묘하게 지켜내는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의 설득력은 그 교묘한 언술이 아니라 미국인 모두가 관여되어 있는 체험과 역사를 상기하게 한 데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흑인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였다. 상처를 훈장처럼 내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그리고 미국인 일반의 양심을 자극할 수 있는 체험으로써 그것을 말한 것이었다. 트레이본 마틴의 비극적 죽음은 자신의 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35년 전의 자기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말로 그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슈퍼마켓에 가면 점원이 뒤를 쫓고, 길을 건너면 멈추어 선 자동차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 바로 그 순간 타고 있던 여성이 핸드백을 단단히 쥐는 것을 보는 것-이런 일은 흑인이면 으레 겪게 되는 일이다-은 오바마 자신도 경험한 바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상적 경험보다 심각한 것은 물론 인종에 따라 법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사회가 이번 사건을 또 하나의 인종주의 사건으로 보고 분개하는 것은 그것을 그간에 쌓인 체험과 역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들의 입장만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흑인들은 폭력의 희생자면서 폭력을 행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국 역사가 흑인에게 저질렀던 폭력에서 나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바로잡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흑인들도 자신들이 미국 사회의 완전한 일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장된 항목을 나열하는 거대한 계획과 같은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거대한 정치 계획은 과도한 정치화 그리고 왜곡을 가져온다. 공평한 법의 처리 문제는 전통적으로 주와 지방 정부의 소관이다. 그러나 지방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처를 연방 전체로 확장해 나갈 수는 있다. 문제의 해결에는 정치가들의 담론보다도 오히려 가족, 교회, 직장에서의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 일리노이 의회에 몸담고 있었을 때 그는 길에서 단속의 대상이 되는 흑인 수를 통계적으로 기록하게 하는 법을 만든 일이 있다(이 법은 흑인이 부당하게 가두 검색의 대상이 되는 것을 억제하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이번 일에서 중요했던 ‘정당방위법’이 보다 인도적으로, 보다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검찰총장에게 지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인종차별 문제의 해결에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조처들이 효과적이라는 말을 하고 난 다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처우가 크게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말을 끝냈다.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겠다는 그의 뜻을 다짐하는 것이 연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그리고 미국인에게도-인상적인 것은 그의 연설이 길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포괄하고, 특히 흑인 차별의 체험적 현실에 대한 깊은 느낌을 환기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되풀이하건대,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미 이루어진 법집행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당한 것으로 항의하는 흑인 공동체의 정당성도 인정한다(물론 그것을 폭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위엄과 예절’을 가지고 행동한 마틴의 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보다 큰 목표에 의하여 지양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로 오바마 대통령이 내거는 것은 인종주의의 부당성을 교정하는 일이다. 그것을 그는 조용하게 체험과 역사를 잊지 않게 하며 설득하려 한 것이다.


트레이본을 위한 정의’의 촛불 (로이터 연합)


공평치 못한 제도를 바로잡는 일은 정치 기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제도가 생산해내는 인간적 고통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이다. 공감할 수 있는 체험적 현실을 잊지 않아야 정치적 합의가 가능해진다. 집단행동에 추상적 정강과 정책 그리고 구호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대결과 폭력은 있어도 해결은 얻지 못하는 정치 작전이 된다. 우리 현실에서는 삶의 체험적 현실을 깊은 공감과 동정으로 마음속에 느끼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행동의 프로그램으로 이어갈 수 있는, 감성과 지성의 정치지도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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