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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작고한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저서에 <우리나라를 이루어내기>(Achieving our Nation)란 것이 있다. 기발하다면 기발한 책 제목은 그 나름의 중요한 뜻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국가에도 정체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할 것도 없이 로티의 의도는 미국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정립함으로써 나라를 이루어내는 것은 미국에서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요즘 우리 정치 현장의 뉴스들을 보면, 그다지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사항들이 나라 전체를 흔들 정도의 분규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을 본다. 이것은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불확실한 것, 또 모든 정치 행위가 이 정체성을 닦아내는 일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한 의식이 철저하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기준을 가지게 되고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그 구성에 크게 관계되지 않은 일들은 조금 더 조용한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일 것이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에서 가장 먼저 자유, 평등, 우애(또는 행복의 추구)를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념들이 한 번의 선언이나 법 또는 제도의 수립으로 국민 생활의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것이다. 


국가 정체성(일러스트 김상민)


로티 교수의 생각에 미국 민주주의의 목표들은 역사적으로 여러 사상가들에 의하여 여러 측면으로 또 되풀이하여 강조되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실현되어야 할 이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로티 교수의 저서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과 그것이 말하여 주는 미래의 희망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미국 민주주의에서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실현되어야 할 것은 평등과 우애의 이상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 이념에서 자유는 평등과 하나가 되었거나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평등은 사회정의가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유대 없이 하나로서 생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로티 교수의 좌파적 해석에 사람들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의 대부분 우파들은 그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로티 교수는 “관조적” 또는 “이론적 좌파”라고 하여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이념적 진보주의자들도 이에 동의하지는 아니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의 ‘공산주의 행동주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한 이론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로티 교수에게 이들의 진보주의는 이론가들의 개념놀이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사회정의와 사회혜택을 분명히 하고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실용적 좌파”의 생각과 행동이다. 그가 생각하는 실용적 진보주의의 사회 목표는 자본주의 내에서도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여러 목표--빈곤의 고통 감소, 사회적 차별에서 유래하는 수모의 제거, 다양한 인간성 발전의 기회 확대 등이다.


<우리나라를 이루어내기>는 1998년에 출간된 것인데, 그 시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그 후의 자본주의 전개가 반드시 그의 개선주의적 입장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로티 교수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고 생각한 진보주의의 한 특징은 대체로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론 진보주의자들의 지나치게 이론적인 체계화가 현실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지만, 바로 자본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체계성이 부분적 개혁을 도로아미타불이 되게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티 교수는 이에 답하여 개혁의 노력이 끊임없어야 하는 것은, 그가 다른 저서에서 강조한 바 있는 ‘우연성’이 현실의 특징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 논하려는 것은 로티의 진보주의론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비친 바와 같이, 그의 저서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는 가르침--즉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서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지속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합의할 수 있는 정치 목표의 틀을 갖지 않는 사회가 적정한 삶의 질서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 의식에 뒷받침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 이 의식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사회를 생명 공동체로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다. 로티 교수의 평등의 강조는 분명 인간의 윤리 의식에 이어진다. 그러나 그가 윤리의 중요성 자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별도로 강조될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에 보는 갈등과 투쟁의 사례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과제들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것이 사안의 경중을 가리게 하고 공동체적 일체성의 훼손을 주저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동지역 이슬람 국가의 혼란은 정치적인 합의 그리고 도덕적 생명 의식의 부재가 가져오는 참혹한 결과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무함마르 무르시 대통령 정권의 붕괴를 전후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폭력의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불에 타고, 사회와 경제가 최저의 일상생활도 할 수 없는 마비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이 최근의 보도와 보고들의 내용이다. 


주한 이집트인 20여명이 1일 오전 서울 한남동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이집트 군부의 시위대 유혈진압을 규탄하고 있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출처 : 경향DB)


이 혼돈의 가장 큰 원인은 종교적 갈등이다. 이슬람주의, 이슬람주의 안에서도 수니와 시아파, 콥트 기독교, 세속주의 등 여러 종교적, 정신적 지향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가르고, 이 가름은 비아의 박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권력 투쟁, 사회적 경쟁의 동기도 중요하다. 혼돈을 기화로 하여 무의식에 쌓여 있던 증오가 그 분출구를 찾아 폭발하기도 한다. 여러 폭력사태 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고문과 학살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이유로 총기 협박을 받은 사람의 경우는 이러한 부정적 심리와 정치와 종교적 갈등이 범벅이 되어 나타난 기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르시 전 대통령은 근대 이집트 역사에서는 예외적으로 민주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그의 정권은 여러 가지 신앙과 가치의 차이를 하나의 관용의 질서 속에 포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이룩해 나갈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헌법이나 인사정책 등에서 그의 소속 단체인 ‘무슬림 형제동맹’의 가르침대로 정부를 이슬람 독재정권으로 전환할 의도를 드러내었다. 그것이 반대 시위, 반대의 반대 시위를 폭발하게 하고 이집트를 파괴와 살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게 했다.


민주주의는 다원적 가치를 포용하는 정치 체제이다. 그러나 다원적이라는 것은 하나로 존재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사회의 자기 정체성이 사회를 하나로서 확인하게 한다. 그러한 확인은 하나의 결단이라기보다는 그치지 않는 합의를 위한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정치 원칙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과정의 일부이다. 물론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고 하여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차이와 갈등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나 갈등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전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부적인 문제로 인하여 유발되는 큰 갈등은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는 작고 큰 것을 넘어 일체성으로도 존재한다. 이것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뒷받침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귀중함에 대한 도덕의식이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는 모든 사람의 삶을 존중하고 그 공동 번영을 약속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말은 한국인의 정치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성스러운 단어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것으로 정의하려는 역사는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다. 이제 사회의 하나됨은 보다 구체적으로 추구되는 정체성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 정체성은 어떤 고정된 신앙개조(信仰箇條)라기보다는 사회 안에 진행되는 정치적·도덕적 추구의 심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이 “나라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의 핵심을 이루어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외경심을 갖는다. 이것이, 반드시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갈등과 투쟁을 조금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할 것을 희망해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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