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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 지나가고 있다. 공부가 직업인 사람으로서 한 해를 기억하는 방식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1년 동안 읽은 책을 돌아보는 것일 게다. 타인의 생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반추할 때 인간의 사유는 진화하는 법이다. 독서가 사유를 압도해선 안된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검증받지 않은 사유 또한 현실의 대지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돈다고 나는 믿는다.

올해 가장 인상적인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10월에 우리말로 옮겨진 지그문트 바우만의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들고 싶다. 지난해 1월 바우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경향신문의 요청으로 그를 추억하는 추도문을 쓴 바 있다. <레트로토피아>는 지난해 3월에 출간되었기에 당시 나는 이 책을 보지 못한 채 그와 그의 학문을 추모한 셈이었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의 이론가다. 그의 메시지는 우리 시대가 ‘고정화된 현대’에서 ‘유동하는 현대’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유동하는 현대’란 모든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힘’이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된 시대를 말한다. 그는 이 힘이 체제를 ‘사회’로, 정치를 ‘생활정책’으로 바꾸고, 사회문제들을 ‘거시적 차원’에서 ‘미시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우리 시대는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유형의 삶을 일반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지속성에 무관심해지고 즉시성이 지배하는, 그리하여 모든 것들이 개인화하고 사유화하는 시대가 바로 ‘유동하는 현대’라는 게 바우만의 이론틀이었다.

이랬던 바우만이 자신의 유언장과 같은 이 책에서 ‘유동하는 현대’로부터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핵심적 흐름을 ‘레트로토피아’에서 찾는다. 레트로토피아는 유토피아를 염두에 두고 주조한 말이다. 유토피아가 미래를 향한 비전이라면, 레트로토피아는 과거에 대한 향수다. 좋았던 과거, 다시 말해 안정성과 신뢰성을 품고 있던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절에로의 회귀가 레트로토피아의 중핵을 이룬다.

내가 이 칼럼에서 말하려는 것은 레트로토피아의 구체적인 양상이 안겨주는 현실적인 함의다. 바우만은 오늘날 관찰할 수 있는 레트로토피아의 네 가지 경향을 제시한다. 공공질서 유지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의 회귀, 민족·인종·종교를 기반으로 한 부족주의로의 회귀, 신분이자 운명으로 개인을 구속하는 불평등으로의 회귀, 경쟁이 부재한 안전한 장소인 원초적 자궁으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바우만의 분석이 일차적으로 고려한 대상은 미국과 유럽의 서구사회다. 그런데 이러한 관찰과 논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 또한 결코 작지 않다. 각자도생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경쟁 논리, 이념과 세대 등을 앞세운 정치적·문화적 집단주의, 고착화하고 세습화하는 빈부격차, 사회 구조로부터 개인적 삶으로 퇴각하는 내면적 망명이 최근 우리 사회의 저류(底流)를 이루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올해 우리 사회를 뒤흔든 분노 범죄들의 잇단 발생, 정체성의 정치의 연이은 분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 소확행과 케렌시아 등 작은 행복에의 애착은 바로 레트로토피아가 펼쳐 보이는 낯익은, 그러나 불편한 세계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레트로토피아에 맞서 바우만이 제시하는 대안이다. 레트로토피아에는 불안, 절망, 공포, 분노의 심정이 뒤엉켜 있다. 이 복잡한 심사는 자기 세계의 일방적인 방어와 타자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바우만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설파한 ‘대화’를 역설한다. 대화는 만남이자 참여이고 협상이자 포용이다. 대화는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 의식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간의 끊어진 회로를 복원하는 출발점이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이러한 대화를 위해 바우만이 강조하는 전제조건이다. 바우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한다. “만약 우리 사회를 다시 판단하고 싶다면, 특히 청년들을 위해 품위 있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만족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혜택을 지향하는 새롭고 포괄적이며 공정한 경제모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인류의 미래를 걸머질 청년들이 레트로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게 하는 일자리 창출과 이를 위한 혁신과 통합과 공정의 경제모델 구축이야말로 사회학자로서의 바우만이 남긴 유언인 셈이다. 한국 독자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바우만의 유언이 우리 사회에 안겨주는 함의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바우만을 다시 한번 추모하는 까닭이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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