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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은 잠시지만, 먹고사는 일은 평생이다. 남북 정상과 북·미 정상의 역사적 만남이 몰고 온 짜릿한 감동이 가라앉자, 우리 사회의 해묵은 난제들이 떠오른다. 높은 지지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정치 개혁과 남북 관계 등 어떤 부분에서는 눈에 띄는 성과를 일궜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개혁과 변화가 지지부진하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내년도 최저임금,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개편안을 놓고 논쟁이 뜨겁다. 최저임금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저임금 노동자, 수입이 최저임금도 못된다고 하소연하는 소상공인, 모두 일상의 무게가 버거운 사람들이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소득주도성장의 속도조절론이 나오더니, 이젠 방향 전환에 대한 의구심도 피어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걸쳐 길게는 10년씩 투쟁하던 해고노동자들은 여전히 거리에, 굴뚝에 있다. 노동자 해고와 관련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징후가 농후하지만, 변화는 없다. 이번이 30번째, 또 한 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세상을 등졌다. 31번째 희생자를 막고, 이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를 차렸지만, 변화는 없다.

얼마 전 감사원 발표로 홍수와 가뭄 예방, 수질 개선을 명분으로 밀어붙였던 ‘4대강사업’이 철저한 사기극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대통령이 진두지휘를 맡았고, 국토부, 환경부, 기획재정부 장관은 알면서도 적극 협조했다. 강은 망가졌고, 강에 의지하며 살았던 농민과 어민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엄청난 범죄이지만, 감사원은 이런저런 이유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4대강 재자연화는 더디게 흘러간다. 미군기지 환경오염, 설악산오색케이블카를 비롯한 산지개발, 가리왕산 스키장 복원. 문제는 풀리는 게 아니라 쌓여간다.

처한 현실이 어려울수록 근본을 돌아보라고 했다. 엊그제가 제헌절, 헌법은 다른 법의 근본이니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 할 말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제헌헌법 ‘제6장 경제’가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인 제84조,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가 개인의 “경제상 자유”에 앞선다고 천명한다. 제헌헌법은 분배를 통한 사회정의 실현을 경제의 목표와 방향으로 삼았다. 현행 헌법의 해당 조문을 보니,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가 앞서고 “사회정의”는 사라졌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을 현행 헌법은 이제 자신의 모태인 제헌헌법과 대립할 지경이다. 제85조는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에 대해 “공공필요”에 따른 개발을 원칙으로 내세운다. 제헌헌법의 “공공필요”의 원칙은 자연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주는 개발의 제어원리로 작동할 것이다. 현행 헌법은 ‘개발’을 ‘보호’에 앞세우고 개발의 성격과 방향은 언급하지 않는다. 역시 제헌헌법과 큰 차이가 난다.

경제(economy)는 어원상 가정(oikos, eco) 관리, ‘살림살이’를 뜻한다. 살림살이는 식구 모두가 잘 지내도록 집안을 돌보는 것이니, 분배와 지속가능성이 경제의 핵심이다. 제헌헌법 “제6부 경제”가 지향하는 것이다. “사회정의”는 기계적 공정이 아니라 약자 중심의 사회를 요구한다. 그럴 때만, 모든 사람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 “공공필요”의 원칙에 따라 자연을 이용할 때, 자연생태계 보전도 가능해진다.

우리의 경제 현실에서 제헌헌법의 경제 철학이 가리키는 길로 들어서는 건 쉽지 않다. 가야 할 길 앞에서 머뭇거리기 쉽다. 그러나 개혁을 위한 ‘카이로스’는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현 정부는 주권자의 압도적 지지로 출범했다. 아직도 지지율이 높다. 행여, 높은 지지율을 까먹을까 하여 해야 할 일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길.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높은 지지율을 아낌없이 써버리길. 진중하되, 담대하길.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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