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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우 김보성의 음료광고로 ‘의리’라는 단어가 엄청난 인기다. 젊은이들은 “독도는 으리 땅” 식으로 사용하는 모든 단어에 ‘으리’를 넣는 패러디를 즐기고 있다. 의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신의·예의·도의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만이 아니라 세상의 바른 도리, 즉 ‘정의(正義)’를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공자가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말했을 때, 그 ‘의로움’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의리는 ‘유사(類似)혈족’ 보스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과 구성원의 맹목적 단결을 강조하는 덕목으로 변질됐다. 내란, 군사반란, 독재의 책임자 전두환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는 이유로 장세동은 “의리의 돌쇠”라고 불렸다. 조직폭력배도 이런 식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조직을 탈퇴하거나 배신하는 사람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한다.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 또는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덮어놓고 뭉치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 또는 학교 출신을 불문곡직 배척한다. 정부나 기업 내부의 범죄나 비리의 장본인들은 이를 폭로하는 공익제보자들을 ‘배신자’로 비난하며 꼭 의리를 들먹인다.

많은 정치인들도 의리를 이렇게 왜곡해 사용한다. 2011년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일부 친이명박 직계 의원들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의리를 내세우며 “이 대통령을 배신해선 안된다”고 강변했다. 2011년 당시 박근혜 의원은 서청원씨가 이끄는 친박 조직에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2013년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대선 이전 북방한계선 대화록을 입수했다는 발언을 유출한 사람으로 지목된 김재원 의원은, 김무성 의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 앞으로도 형님께서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이오니 혹시 오해가 있으시면 꼭 풀어주시고 저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서청원 의원은 “새누리당원은 위기 때 의리로 뭉친다”며 목청을 높였다.

의리의 선거, 앵벌-으리 (출처 : 경향DB)


의리는 “우리가 남이가?”를 실천하는 패거리주의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자행하거나 은폐하는 것도 아니다. ‘정의 없는 의리’는 ‘유사조직폭력배’의 자기보호 규율에 불과하다.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발간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선 ‘정의 열풍’이 불었다. 샌델의 초청강연과 정의 관련 서적 발간이 잇따랐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의 수준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예컨대 1997년 대선 시기 한나라당 후보에게 불법자금을 지원할 것을 모의·실행한 삼성 측 인사는 형사처벌에서 자유로워졌으나, 문제의 ‘삼성 X파일’을 공개한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노회찬 의원은 2013년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2012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한 장진수 주무관은 표창을 받기는커녕 증거인멸의 공범으로 취급돼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선거개입이라는 헌정문란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반성은커녕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의리 경영”을 강조하던 “의리의 사나이” 한화 김승연 회장은 거액의 배임죄를 범한 것이 적발돼 처벌됐다. 25명이나 되는 노동자의 죽음과 116일 동안의 송전탑 고공농성을 불러온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는 회계조작에 기초한 부당한 것이었다고 서울고등법원이 판결했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은 철회되지 않았고,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가? ‘정의 열풍’이 법과 제도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리에서 정의를 삭제한 세력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년째 줄곧 의리를 외쳐온 김보성에게 대중이 갑자기 열광한 것은 진짜 의리가 사라진 현실에 대한 풍자와 경고 아닐까.

정의론 책이 많이 팔리고 읽힌다고 그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으리, 으리”를 외친다고 정의가 구현되는 것도 역시 아니다. 7·30 재·보궐선거가 다가온다. 진짜 의리, 즉 ‘정의 있는 의리’를 지키고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후보에게 한 표를 보태는 것이 정의의 시작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김보성은 말했다. “의리가 지나가면 정의를 하고 싶다. 정의가 있는 의리가 중요하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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