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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프란치스코 현상’이라 할 만하다. ‘파파 프란치스코’의 말씀과 행보, 눈빛과 손동작 하나하나가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육화(肉化)된 신앙의 진면목 앞에 종교를 넘어 거의 모든 시민은 감동을 받았다. “국민소득 3만달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엄청난 위세를 뽐내는 건물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며, 최고급 명품과 명차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있지만, 그 뒷면에서는 가난, 불안, 소외, 억압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한국적 현상이자 세계적 현상을 교황은 직설화법으로 비판했다.

교황은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고 축원했고, “막대한 부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를 경고했다. 그리고 낮은 자세로 사회·경제적 약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껴안았다.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저파(低派)’였다.

힘과 돈을 가진 자들 중 교황의 이런 발언에 마음 불편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속으로 “종교인이 왜 정치발언이야!”, “남미 출신이라 ‘해방신학’에 물들었구먼!”이라며 툴툴거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반공권위주의 체제가 종료한 지 오래지만, 우리 사회에서 교황 정도의 발언을 한 사람은 여전히 ‘좌경용공’으로 낙인찍히고 공격받는다. 언제부터인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노선 외에는 모두 ‘종북좌빨’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정부, 기업, 언론 등도 모두 교황 방문을 환영했지만, 그의 비전과 제안은 외면했다. 아니 정반대로 움직였다. 교황은 취임 후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이며 불평등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문제”임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는 암 덩어리”라고 선언했다. 이후 정부는 ‘경제 살리기’의 명분 아래 부동산 및 서비스업 규제 완화, 의료시장 영리화 등을 추진하고 있고, 보수언론은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 뒤에서 기업은 미소 짓고 있다. 대선 시기 써먹었던 ‘경제 민주화’ 깃발은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다. 박 대통령은 ‘율리아나’라는 가톨릭 세례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과 행동은 ‘프란치스코’의 정반대 편에 있다.

바티칸에서 온 선물 박근혜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청와대에서 선물 교환을 한 뒤, 교황이 선물한 바티칸의 전경이 그려진 액자를 감상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한편 교황은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싸우라”고 강론했지만, 우리나라 유력 일간지가 교황 방한을 축하하며 뽑았던 기사 제목은 “돈이 도네요… 고마워요, 프란치스코”였다. 또한 교황은 “무한경쟁 사조에 맞서라”라고 강조했지만, 정부와 기업의 최상부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제도와 문화를 찬미하고 있다.

교황은 세월호 유족, 쌍용차 해고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피해자, 밀양 송전탑 건설지역 주민 등을 만나 위로했지만, 정부는 줄곧 이들을 배제하거나 억압해왔다.

‘파파 프란치스코’는 짧은 시간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추한 민낯을 드러냈고, 이윤과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맹성(猛省)의 기회를 주었다. 그의 언행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며 깊고 넓은 파급력을 가질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필자도 ‘프란치스코주의자’는 되고 싶다.

그러나 그가 던진 문제를 해결할 주체는 역시 이 땅에 사는 우리다. ‘파파 프란치스코’를 찬미한다고 그가 지적한 대한민국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선택한 ‘쏘울’을 탄다고 바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지 않는 것처럼. 또한 교황이 지적한 문제는 단지 신심(信心)과 기도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세속의 정치, 법,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세상의 모순과 부딪치며 끈질기게 노력할 때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 교황 자신이 “공동선을 위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이기적”이라며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중립을 지켜야 하니 세월호 리본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음을 기억하자.

‘파파 프란치스코’를 칭송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실천이 없으면 ‘체 게바라’라는 기표(記標)가 그랬던 것처럼, ‘파파 프란치스코’는 ‘혁명성’이 사라진 또 다른 ‘문화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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