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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님 귀하.

저는 귀하의 대통령 당선에 반대했지만, 대선 후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깃발을 낚아챈 탁월한 능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라”고 고언했습니다(동아일보 2013·2·4 ‘진보가 박근혜에게 말한다’ 인터뷰). 그러나 경제민주화, 노인 기초연금 20만원, 4대 중증질환 100% 국가책임,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 50만원, 무상보육, 반값 대학등록금 등 대선공약은 줄줄이 파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식언(食言) 앞에서 ‘절반이라도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자신을 탓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2012년 12월14일 “문재인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통령 비방하는 댓글 하나만 달아도, 컴퓨터 내놓으라고 폭력정치, 공포정치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분개하던 귀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최근 귀하의 “대통령 모독” 발언 이후 검경의 위헌적 형벌권 남용을 보니, 당시 발언은 타인의 이름을 빌린 자기예언이었더군요. 검찰은 주요 포털과 카카오톡 등에 대한 ‘사이버 사찰’을 벌였고, 경찰은 조능희 MBC PD의 리트윗 하나를 문제 삼아 유치장에 집어넣었습니다. ‘국가원수 모독죄’와 ‘유언비어 유포죄’라는 황당한 죄목으로 시민의 입을 막던 유신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시절입니다.

2014년 5월16일 세월호 유가족들과의 면담자리에서 “할 말 있으면 언제든 청와대로 찾아오라”고 위로했고, 5월19일 담화문 낭독 시 눈물을 흘리셨지요. 그런데 이후 유가족들과의 재면담은 거부하고 유가족들을 철저히 고립시키면서 세월호특별법 협상의 ‘가이드라인’을 지시하는 모습을 보니 ‘얼음공주’의 눈물은 몇 도였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고 정치민주화를 심화시킬 생각이 귀하에게는 없음이, 친분 있다는 독일 메르켈 총리의 ‘엄마 리더십’을 발휘할 생각 역시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와중에 두 가지만은 실현하길 희망합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분권형 개헌입니다.

저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북 간 정치적·군사적 긴장은 고조되었고 경제협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2007년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서해 평화협력지대, 조선협력단지 건설, 직항로를 이용한 백두산 관광 등은 말도 꺼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2010년 ‘5·24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함이 없습니다.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남북 평화공존과 경제협력은 남북 모두에 유리합니다. 귀하 스스로도 2014년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이라고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2014 세계지식포럼 개막식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있는 박 대통령 (출처 : 경향DB)


북한의 ‘병영국가’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관적 희망과 객관적 현실을 혼동하며 ‘북한 붕괴’의 주문을 외는 사이비 북한 전문가들과 거리를 두십시오. 남북정상회담은 다름 아닌 귀하의 아버지가 하려 했던 일입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만나지 못했지만, 박근혜와 김정은은 만나야 합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성과입니다. 귀하가 결심하면 귀하의 핵심 지지기반인 극우반공세력도 순순히 동의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야,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분점에 기초한 연합정치를 가능케 하는 권력구조를 만드는 것은 정파의 유불리를 넘어선 국민통합과 정치안정을 위한 주춧돌입니다. 물론 개헌 외에 51%가 100%를 가져가는 선거법 개정도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추진을 공약했던 귀하는 이제 개헌 논의를 ‘경제 블랙홀’이라며 반대합니다. 의회의 권한을 위협하는 월권적 반대입니다. 개헌 논의 자체를 처벌했던 유신 시절 긴급조치가 생각나더군요. ‘경제 살리기’는 개헌과 무관하게 임기 내내 추진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규제를 풀어서 경제를 살린다는, 실패가 입증된 신자유주의 정책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극히 의문입니다.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내년 중에 마무리하지 않으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때문에 개헌은 무망(無望)해집니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 ‘분권형 대통령제’를 확립한 대통령이 되십시오. 대북정책의 전환과 분권형 개헌은 정파를 넘어선 국민적·시대적 과제입니다. 귀하의 업적으로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각하’! ‘창조경제’ ‘국가 대개조’ 등 휘황찬란한 비전을 접고 이 둘에만 집중하십시오.


조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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