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불안하게 덩치 키우는 서울
조선의 흔적 빠르게 씻겨 나가
‘서울사전’ 하나 만들고 싶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번역을 하는데, ‘자각(紫閣)’이란 말이 나왔다.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었다. 경인 선생님(필자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인 임형택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응, 서울을 자각이라 그랬어” 하신다.

그 뒤로 서울이란 오래된 도시에 관심이 쏠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서울의 장소성에 흥미가 생겼던 것이다.

공부를 하다보니 한문학사(史)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거개 서울 사람이었다. 특히 조선후기가 되면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다.

박지원과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이 어울려 살던 곳도 종로 백탑 부근이었고, 김창협과 김창흡(金昌翕) 등도 모두 서울 자하문 근처에 살았던 것이다. 또 대개의 서울 양반들은, 충청도와 경기도에 따로 향제(鄕第)를 두고 살았다. 홍대용은 충청도 청주(지금은 천안이 되었다)에 향제가 있고, 서울 남산 아래 서울집이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에 향제, 가회동에 서울집이 있었다.

서울은 1980년대에 급속도로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1981년 제3한강교를 건너 세곡동 쪽으로 가는데, 양재동 시민의 숲 어름을 흐르는 수로에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빼곡히 앉아 있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흔적, 전근대의 자투리는 급속도로 씻겨나가고 있다.

나는 부산 태생이고 집안은 원래 경상북도다. 서울은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서울의 지역성에 대해서는 아주 젬병이었다. 이곳저곳 지역의 내력에 대해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주변의 ‘서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른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서울과 관련되는 유일한 끈이라면 서울 여자와 만나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토박이인 처가 식구들에게 물어도 얼마 전의 서울만 알 뿐, 조선시대의 서울, 해방 전의 서울은 잘 모른다.


이래저래 책을 찾아보니 여러 책이 있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 유만공이 쓴 <한경지략(漢京識略)> <세시풍요(歲時風謠)> 등이 조선후기 서울에 관한,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한양가>도 빼놓을 수 없는 자료였다.

<한양가>는 서울 시전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활기찬 분위기, 서울 중하층 사람들의 유흥 등에 대해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 외 강이천(姜彛天)의 <한양사(漢陽詞)>와 같은 연작 한시들도 꽤나 남아 있었다. 이런 책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창해일속(滄海一粟)이었다.

예컨대 ‘우대’란 말은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 할 지명이었다. 경인 선생님께 여쭈어보니, 이희승 선생님을 찾아가 뵈란다. 일석(一石) 선생의 수필을 보면, 마치 서울을 자기 동네 그리듯 그려놓았다.

하지만 무슨 용기로 그 극노인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러구러 시간은 흘렀고 우대도 다른 문헌에서 찾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공부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에 나처럼 서울의 장소성에 궁금증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예 내가 ‘서울사전’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한 적도 있다.

한글학회에서 만든 <서울 지명사전>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명일 뿐이지 않은가. 또 그 서술 방식으로는 과거 서울의 구체적인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 지도와 옛지도, 그 외의 시각 자료를 풍부하게 넣고 관련되는 역사, 문화, 인물 등의 이야기를 곁들인 그런 사전은 어떨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이란 도시는 불안하게도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었다. 아니 빠르다는 말로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날마다 변신하고 있었고 전근대의 흔적을 씻어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울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서울에 관한 것을 모아서 ‘서울사전’이란 것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1993년 서울을 떠났고 이런저런 연구에 쫓겨 ‘서울사전’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그 뒤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다 그 첫머리의 파리 시장의 치밀하기 짝이 없는 묘사를 보고, 과연 오늘날 우리가 조선시대 서울을 그토록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다시 ‘서울사전’을 떠올렸지만,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대신 이래저래 모은 자료에 주해를 붙여 2010년 <사라진 서울>이란 책을 냈다. 아마 앞으로도 내 평생에 다시 서울사전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사전이 풍부한 사회는 문화가 풍요로운 사회다. 사전은 그 사전을 만들 당시까지 모든 문화적 업적을 압축한 것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별별 사전이 있을 수 있다. 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 가보면 별별 사전이 다 있다. 내 서가에도 <갑골문자전> <금병매사전> <홍루몽사전> <시경사전> <이조어사전> <세계사대사전> <철학사전> <음식용어사전> <정치경제학사전> 등 이런저런 사전이 꽂혀 있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일은 고역 중의 고역이다. 요즘 대학에서는 사전을 편찬해도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다. 10년, 20년이 걸려 사전을 만들어도 그 역시 논문 1편과 같이 평가할 뿐이다.

만약 대학에서 사전 만드는 것을 자기 학문적 과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연구업적 0%가 되어 쫓겨나고 말 것이다. 또 사전은 제작이 어렵고 제작한다 해도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누가 그 고생을 감당하려 할까?

사인먼 윈체스트의 소설 <교수와 광인>은 정신병으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던 윌리엄 마이너가 제임스 머레이경(Sir James A H Murray)이 요구하는 어휘의 용례를 찾아 저 유명한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제작에 열정적으로 협력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 역시 사전을 만들려면 감옥에 갇히거나 갇힌 것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인가? 하하!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하자. 과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저런 사전 역시 펼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사전 역시 어떤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