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오늘도 보람 없는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루를 넘기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토록 타락할 줄은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967년 2월14일, 열아홉 살 전태일은 생애 첫 일기를 썼다. 어린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며 평화시장 미싱사에서 재단사로 업종을 바꾼 직후였다. 그러나 전태일은 자신의 뜻과 달리 공장 주인의 처제를 좋아하게 되면서 업주에게 충성하는 종업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초심과 거꾸로 가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다.

전태일의 초창기 일기에 노동현장의 부조리는 보이지 않는다. 재단사의 지위를 이용해 어린 여공들을 돌봐주겠다는 온정주의만 넘쳐난다. 그러나 이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전태일은 ‘시다들을 잘 대해준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미싱사 여공이 각혈로 핏덩이를 토해낸 것을 목격하고는 본격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재단사 모임 ‘바보회’를 결성하고 평화시장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청에 진정서도 냈다. 그즈음 전태일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현실적으로 애통한 것은 너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이렇게 펜대를 할퀴는 것”이라며 평화시장의 열악한 실태를 전한다.

전태일은 노동운동의 투사이자 열사이지만, 노동현장을 기록한 ‘작가’이기도 하다. 전태일이 분신한 직후 조영래 변호사는 죽음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평화시장과 그곳 사람들을 취재했다. 또 여러 차례 이소선 여사를 찾아가 전태일의 성장과정을 들었다. 1983년 나온 <전태일평전>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그러나 전태일의 육필 원고가 없었다면 <전태일평전>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전태일이 생전에 쓴 일기, 수기, 진정서 등이 인용되거나 녹아들어 있다.

전태일은 생전에 노트 5권 분량의 일기를 썼는데, 일부가 분실돼 3권만 전한다. 전태일은 또 자전소설 형식의 ‘회상 수기’를 썼다. 수기에는 전태일의 가출-행상-평화시장 견습공-재단보조-재단사 등 성장 과정이 담겼다. 재단사가 되어 한창 노동운동을 벌일 때에는 평화시장 노동 실태조사 설문지,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작성했다. 전태일은 또 자신의 삶을 주제로 세 편의 소설 초안을 썼다. 이밖에 친구에게 보낸 여러 편의 편지가 전한다. 전태일이 1967~1970년에 쓴 글들은 뒷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1988)로 출간됐다.

전태일의 학력은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2년,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중등 과정) 1년이 전부다. 짧은 학력으로 일기, 편지뿐 아니라 자서전, 진정서, 소설까지 쓰기란 쉽지 않다. 전태일의 육필 수기에는 문법과 맞춤법의 오류가 적지 않다. 학교 공부가 부족한 데다 체계적인 글쓰기 학습을 익히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전태일에게 세상이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는 미싱노동자가 점심을 풀빵으로 때우고, 각성제를 먹어가며 하루 15시간씩 일해야 하는 평화시장 실태를 알려 바로잡고 싶었다. 그 열정으로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했다.

일기에서 시작된 전태일의 글쓰기는 대통령 진정서, 모범업체 설립계획서와 같은 실용적 글쓰기로 확대된다. 생각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전태일은 글쓰기를 통해 자본주의 모순과 인간 소외 문제를 깨치게 됐다. 그의 글에는 “인정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존재한다”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와 같은 철학적 단상이 적혀 있다. 작가 조지 오웰은 글쓰기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으로 구분했는데, 전태일의 경우 자신을 드러내려는 ‘순전한 이기심’에서 출발해 ‘정치적 목적’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태일에게 미학적 열정이나 역사적 충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김소월의 시를 즐겨 읽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니스 상인> <비곗덩어리>와 같은 소설도 접했다. 그가 회고록을 쓰고 소설까지 구상한 것은 부조리한 세상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의지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노동하고 글을 쓰고 투쟁하면서 생각을 벼렸다.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의 사유와 실천을 ‘전태일 사상’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인간 사랑, 밑바닥 생활로 각성된 실천의식,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정신이다. 전태일은 진정, 시위, 파업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노동조건 개선에 나섰지만,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최후의 선택은 자신을 버리는 것. 1970년 11월13일 몸을 사른 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이 구호에 전태일 사상의 고갱이가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조운찬 칼럼]인문학,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인문학이 실종됐다. 청중 앞에서 열띤 강의를 펼치는 유명 강사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인문강...

news.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