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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열차가 종착역 코앞에서 덜컹거리고 있다. 열차를 막아선 것은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대통령의 법률대리인단이다. 그들은 탄핵사유를 확인하는 수많은 증거들을 부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특검 등 국가기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문제로 여기지 않는 듯하다. 탄핵을 피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태도이다. 헌정질서 파괴와 국정농단 혐의로 탄핵심판 중인 대통령이 또다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막장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탄핵 이전보다 탄핵 이후 발생한 탄핵 사유가 더 중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통령 법률대리인인 김평우 변호사의 변을 보자. “친구 하나 잘못 두신 죄로 그 깨끗한 이름을 잃으시고 탄핵소추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끝까지 의연하게 대통령의 품위를 잃지 않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신 박근혜 대통령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김 변호사의 저서 <탄핵을 탄핵한다>의 서문) 현직 대통령이 사상 최초로 특검수사와 탄핵심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국회가 죄 없는 대통령을 직무 정지시키고 청와대에 가둬놓고 탄핵하려 한다”고 모략하는 그에게서 대한변협 회장을 지낸 원로 변호사의 경륜과 자존심은 찾을 길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변론이 27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등 8명의 재판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불출석한 박 대통령은 대리인단 이동흡 변호사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또 다른 대통령 대리인 서석구 변호사의 기행도 만만찮다. 그는 “촛불집회는 김정은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박 대통령의 부정한 기업 청탁 수용에 대해 “백성의 하소연을 소홀히 말라는 육영수 여사의 유언을 지킨 것”이라는 황당한 지론을 편다. 헌재 재판정에서 태극기를 몸에 감고 퍼포먼스를 하는 그가 한때 “대구·경북지역이 수구로 회귀하면 안된다”고 부르짖던 인권변호사요, 부산지역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에서 소신 판결을 내린 양심판사였다니 믿기 어렵다. 단순히 시간이 그를 비루하게 변모시킨 것이라면 더 이상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는 누리꾼 댓글에 공감한다. 

이들은 플라톤의 ‘원시적 정의론’을 신봉하는 듯하다. 플라톤은 <국가론>의 첫머리에서 “동지들에게는 선을, 적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 정의다”라고 썼다. 21세기 원로 엘리트의 윤리 의식이 기원전 40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여당도 국론 분열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언행은 단순한 정치적 의견 표출을 넘어 탄핵반대 시민들의 논리와 행동강령으로 거듭난다. 정치적 공황에 빠진 보수층 사이에서 헌재 결정 불복과 내란 선동 발언이 끝없이 재생산되고 내면화·신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 곁의 평범한 이웃들이 김평우·서석구로 변모한 결과는 보수 사회의 광범위한 광기화, 파쇼화로 이어진다. 보수 성향 커뮤니티에 살인과 테러를 주창하는 섬뜩한 글들이 넘쳐나는 이유를 알겠다.

일반 시민사회와 소규모 공동체에서도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낭자하다. 학부모 모임 밴드가 몸에 태극기 두른 사진을 올린 엄마 때문에 문을 닫고, 탄핵 찬반 논란 탓에 “고교 동문 카톡방이 디비지는” 사태가 속출한다. 한 보수성향 커뮤니티에는 “태극기 집회에 못 나가게 하는 자식과 관계를 끊었다”는 60대의 글도 올라왔다. 이른바 ‘태극기 부모’와 ‘촛불 자녀’의 갈등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평우 변호사의 내란 선동 발언을 무작정 내칠 수만은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박 대통령은 어제 헌재 마지막 변론에서조차 탄핵 사유를 모조리 부인했다. 수많은 증거와 정황들을 반박하는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변론 연장만 주장하는 태도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종료 30초를 남긴 축구 경기를 뚜렷한 이유 없이 30분 더 연장하자고 떼쓰는 식이다. 헌재 판결이 2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발언이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다. 박 대통령이 “어떤 상황이 오던 혼란을 조속히 극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현 시국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만큼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예방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검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민들은 행복해했다. 법이 작동하고 정의가 통하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아니라도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역할마저 외면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공식적인 탄핵심판 결과 승복 선언이 시급하다. 대권주자들에게만 요구할 게 아니다. 과열된 사회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헌재 판결 승복을 촉구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번에는 박 대통령 차례다. 박 대통령이 한 번만이라도 법치 수호의 책무자로서 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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