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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장의 세계화를 이끈 아마존닷컴(이하 아마존)이 온라인에서 책을 팔기 시작한 것은 1995년 7월입니다. 이 해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95를 출시했고, 세계무역기구(WTO)도 출범했습니다. 1995년은 그야말로 정보화와 세계화의 운명적인 해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막 지났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시작된 종이책의 역사에 비하면 겨우 출발점에 선 것에 불과하지만 지난 20년의 변화는 너무 가팔랐습니다.
20세기 말에 종이책의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종이책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로 열풍을 일으켜 일확천금을 노려보려는 정보상업주의자들, 신문과 책에 놓이는 정보가 같다고 보는 언론인들과 신문방송학과 교수들, 그리고 천방지축 날뛰던 일부 출판인들 등 네 부류였습니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지만 책 세계의 유통, 생산, 소비 시스템에는 엄청난 혁명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책을 미끼상품으로 활용해서 세계 최강의 종합 인터넷 유통업체로 성장한 아마존이 있습니다. 아마존은 이제 구글, 애플과 함께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플랫폼 기업이 되었습니다.
아마존은 2005년부터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직접 단편을 의뢰해 만든 종이책을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10년 킨들을 출시한 이후부터는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임프린트)를 차려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마존은 판매만이 아니라 책의 기획부터 소비까지 출판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적인 체제를 다져나가고 있습니다.
제이슨 머코스키가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흐름출판)에서 지적했듯이 아마존이 생산한 전자책은 “소설, SF소설, 연애소설,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포르노물” 등에 불과했습니다. 아동·청소년용 교과서나 교양서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이슨 머코스키의 지적처럼 “전자책 혁명의 핵심적 모순”입니다. 지금 미국 전자책 시장 매출의 절반은 성행위에 큰 비중을 둔 로맨스소설을 뜻하는 ‘에로티카’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책의 유통과 생산에 있어 아마존이 주도권을 잡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책 소비 자체를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닙니다. 아마존이 2015년에 시애틀에 평점과 사전주문량, 판매량 등을 토대로 엄선한 6000권의 책을 진열한 오프라인서점 ‘아마존북스’를 연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서점에서 지금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웠지만 아마존조차도 전자책마저 독자가 눈으로 직접 책을 확인하고 구매하는 속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비슷한 시기에 뉴욕 독립서점의 상징이던 리졸리서점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세계 최대 출판사인 펭귄랜덤하우스는 오프라인 독립서점의 출점과 독립서점을 통한 독자들의 커뮤니티를 돕고 있습니다. 국내 최대의 온라인서점 예스24도 이제 오프라인서점을 개설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에 그랬듯 앞으로도 종이책과 전자책 어느 일방의 승리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책 세계는 종이책이 중심이되 종이책에 디지털 감성을 입히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습니다.
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마트페이퍼’는 종이가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노트에 손으로 쓴 글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바로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어 자동으로 보관, 검색이 가능해집니다. 이 노트들을 편집해 세계 유일의 종이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미디어창비에서 최근 펴낸 인간과 동물(곰)의 아름다운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그림책 <위니를 찾아서>는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날로그 종이책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부가가치를 제공하는 책들이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실용서와 사전, 오락용 도서들은 구태여 종이책으로 생산되지 않는 세상이 올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수많은 정보가 컴퓨터 안에 존재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합니다. 정보화 사회라는 말을 최초로 만들어낸 우메사오 다다오는 정보는 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아 인간이 일부러 끄집어내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식이자 본질입니다. 검색으로 간단하게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책장을 손으로 넘기며 찾아가는 감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한 권의 종이책을 플랫폼으로 활용한 새로운 상품들이 줄줄이 등장해 인간의 독서행위를 돕게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으로 취임한 이기성 원장은 1차 목표로 ‘향후 10년을 내다 본 전자출판의 인프라 마련’을 제시했습니다. 2000년대 내내 전자책 산업을 키운다며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듯 직접 지원비를 쏟아부었지만 한국의 전자책 업체들은 거의 망했습니다. 전자책 관련 학자들이나 단체, 업체는 한마디로 ‘세금 약탈자’에 불과했습니다. 그 약탈자들과 함께했던 신임 원장이 다시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있는 형상이지요.
지금 출판사들은 종이책과 전자책을 구분하지 않고 종이책과 다양한 미디어를 연계하는 ‘원 소스 멀티 포맷’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부디 신임 원장도 새로운 출판 미래를 준비하는 출판사들을 지원하는 제대로 된 인프라를 마련해주시길 바랍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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