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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주술 사회

opinionX 2019. 4. 19. 10:50

얼마 전 서울대의 한 창업동아리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카페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볼펜을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취지는 이랬다. “좋은 기운을 전해드리고자 직접 손편지를 쓰고, 공부할 때 사용한 펜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해당 게시물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번지면서 학벌주의에 대한 개탄이 이어졌다. 결국 이 창업동아리는 사과문을 올리고 상품 판매를 중지했다. 

이 ‘우발적인 해프닝’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주술에 빠져 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이 동아리는 ‘공부의 신’이 사용하던 볼펜을 사서 공부하면 ‘좋은 기운’이 수험생에게 전염되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단지 ‘사물’에 불과한 볼펜이 현실세계에서 ‘실제 효과’를 발휘하는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주술은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을 비합리적 수단을 통해 성취하려 한다.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은 부귀영화와 장수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대개 사람들은 일상의 합리적 수단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 수단을 활용해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면 주술에 의지한다. 주술사는 초일상적 힘을 조작하여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목적을 얻으려고 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은 ‘생존’과 ‘성공’이다. 한국 사회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 교육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교육이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해야 하는 퀴즈 풀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잘 풀려면 교육받은 내용을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있다가 짧은 시험 시간 안에 모조리 토해내야 한다. 나무 위의 침팬지가 먹이와 적이 어디에 있는지 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들은 이를 ‘사진기억’이라 부른다. 한국 사회는 사진기억 능력을 테스트해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차별대우한다.

한국 사회는 사진기억 능력이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은 곧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이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매니저 맘’이 판치는 학벌자본 세습사회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진기억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가족 전체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여력이 없는 대부분의 가족에게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진기억 능력을 키우라는 미션이 부여된다. 하지만 침팬지가 아닌 바에야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벅차다. 공부라는 합리적 수단이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다. 서울대생이 쓰던 볼펜과 같은 초일상적 힘에 기대는 이유다.

우스꽝스럽지만 이 주술이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효과를 낸다. 사진기억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시험에 통과해서 세속적인 복을 마구 누린다. 최근 헌법재판관 후보 부부의 재산 내역에 많은 국민이 놀란 것은 그들이 무슨 엄청난 불법과 편법을 저질렀다거나 국민의 눈높이를 벗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기억 능력이 휘두르는 막대한 주술적 힘과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부부가 판사와 변호사로 한 20년 일하면 50억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다! 전관예우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태를 통해서만 떼돈을 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대생이 쓰던 볼펜의 주술적 힘에 의지해서라도 사진기억 능력을 키우고 싶다. 물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고도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참과 거짓을 인지적으로 식별하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시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기억 능력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이 과도하게 복을 누리고 있다면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서둘러 수요 공급 함수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왜곡된 보상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서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다. 사진기억 능력으로 얻은 초일상적 힘을 활용해 복을 누리려고만 할 뿐 생존과 성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목적 하나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는 ‘주술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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