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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게 인생인 거지.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날들을 매일매일 의미 있게 만들어 가는 것. 그게 인생인 거지!” 3개월 시한부로 삶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 차순봉씨(유동근 분)는 피를 토하며 창문에 기대서서 막내아들이 두부를 파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혼자 중얼거립니다.
KBS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는 98세 노인이 89세 아내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펼칩니다. 1000만 관객 돌파를 코앞에 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씨(황정민 분)는 고희를 넘겼습니다.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씨도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차에 치여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렇게 잘나가는 문화상품의 주인공은 모두 노인 일색입니다.
지금 뜨고 있는 문화상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었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드라마의 주인공은 젊고 싱싱했습니다. <시크릿 가든>(2011년), <해를 품은 달>(2012년), <내 딸 서영이>(2013년)의 젊은 주인공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성취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정말 갑자기 늙어 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불과 9개월 전에 벌어진 6·25 전쟁에 버금간다는 ‘세월호 참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기록인 <금요일에 돌아오렴>(창비)을 펴낸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은 책에서 이런 깨달음의 말을 내놓았습니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도 영혼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들과 우리 하나하나는 뿌리가 같은 영혼의 나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 한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건 이렇게 서로 깊게 연결되는 것이구나.’”
처음 참사가 터졌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이 땅에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사태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반년도 지나지 않아 침체된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딸을 잃은 ‘유민 아빠’를 비정한 아빠로 내몰기 시작하더군요. 참척의 화를 당하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이는 불한당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살리겠다는 경제는 어찌됐나요? 디지털 혁명의 주도자는 이제 스마트폰이 아닌 사물인터넷으로 말을 갈아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시계, 자동차, 가전제품, 전기, 가스, 수도 등의 인프라와 화장실 등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사물인터넷 말입니다. 사물인터넷의 선두주자는 구글, 아마존닷컴, 애플 등 미국의 IT기업입니다.
가정용 온도 컨트롤(사모스타트)을 개발하고 있는 벤처회사 네스트를 사들인 구글은 인터넷에 접속해 고객의 집 온도를 최적으로 유지하면서 소비전력을 절약하는 디바이스를 개발해 100만대 이상 판매하는 실적을 올렸습니다. 이 간단한 디바이스를 미국의 각 가정에 보급하면 전 미국의 전력소비 상황에 대한 ‘빅데이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데이터를 전력회사에 팔면 막대한 수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마존은 태블릿 단말기 ‘킨들’이나 ‘파이어폰’을 통해 고객의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자동차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과 아이튠즈를 연결한 ‘탑재 시스템’은 이미 페라리나 BMW가 이용을 결정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높은 이익을 내는 플랫폼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한편 체력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단말기 시장은 저가 공세를 펴는 중국과 인도가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전자회사들은 공멸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마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각종 사회지표 또한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해지는 저출산·고령화, 소득격차 확대, 높은 자살률, 65세 이상의 20%를 넘는 131만명의 독거노인, 48%나 되는 노인 빈곤율,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가계부채, 국내총생산(GDP)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는 개인소비의 급락 등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수출 기업의 어려움을 풀어주고 소비를 활성화하려고 작년 8월에 금리 인하까지 단행했지만, 꽁꽁 얼어붙은 소비심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끼리 권력투쟁을 벌이던 구중궁궐의 ‘환관’들은 그게 사달이 나자 자신들의 잘못은 ‘지록위마(指鹿爲馬)’마저 일삼으며 위기를 모면하려 들면서도 반대파들은 초법적인 자세로 제거하고 있습니다. 이미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린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라는 공약에 대해서는 되레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이 없는 국민들은 그저 죽음이나 떠올리며 애도하기에 급급한 게지요.
빌헬름 슈미트는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책세상)에서 “세속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이해되는 초월을 경험하기 위해 들어가는 관문”인 죽음은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경계선을 그어준다”고 하네요. 지금 한국 사회는 그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극도로 허약해지다 보니 이생에서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을 다가올 다른 생명에게 맡기거나 환하게 트인 저승에서의 ‘새로운 삶’에 가능성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상처는 온전히 끌어안아야 하고 애도는 무조건적인 우정이어야 한다지만 죽음의 유령만 너울거리는 한국 사회가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새해에는 모욕당하는 죽음이 모두 사라지고 젊음이 넘치는 충만한 삶만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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