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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로 전국이 들썩이던 9일 김도현씨는 상복을 입은 채 고용노동부와 경찰서를 정신없이 오갔다. 이틀 전 일하다 사망한 작은할아버지의 사고경위가 ‘교통사고’로 처리돼 수사를 종결하려는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경기 화성경찰서는 공사장에서 사망한 지게차 운전자 A씨(69)의 사망원인을 회사 측의 말만 듣고 교통사고로 판단했다. 사망현장은 폴리스라인 하나 없이 훼손됐고, 사망 당시의 CCTV가 있었지만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결과였다. 노동부는 중대재해로 인지했지만 상중이라 경황이 없을 것 같아 장례 후 유가족에게 알리려 했다고 한다. “왜 그걸 당신들이 판단하세요?” 도현씨가 항의했다.

가족 중 누군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때 유가족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 죽음의 원인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제대로 알아야 온전히 슬퍼하고 고인을 애도할 수 있다. 중대재해 조사를 업으로 삼는 노동부조차 유가족의 심경을 잘 모른다. 유가족 지원시스템이 없으니 산재사고 가족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그러니 유가족들은 두 번 황망하고, 두 번 운다.

도현씨가 작은할아버지 죽음을 중대재해로 생각한 것은 3년 전 동생 김태규씨가 건설현장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시공사와 경찰은 ‘단순실족사’로 처리했다. 도현씨가 몇 달 동안 1인시위를 하고서야 재수사가 시작되었고, 꼬박 2년이 지나서야 하청업체 사장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산재사고는 수없이 반복되지만 대부분의 유가족은 산재사고를 처음 겪는다. 그래서 정부가 유가족을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조사와 수사 단계마다 유가족에게 사고의 원인과 수사과정을 알려야 한다. ‘통보’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유가족들은 사고의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유가족이 사고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황망한 죽음’에 대처하는 유가족을 위한 안내서가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한다. 안내서에는 죽음에 대한 수사와 조사과정, 산재신청 절차, 법률적 도움, 트라우마 상담까지 모든 정보가 담겨야 한다.

법무부는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중대재해 피해자 지원을 올 초부터 실시한다고 밝혔지만, 도현씨는 상복을 입고 또다시 경찰서와 노동부를 오갔다. 법은 언제 도착하는가? 중대재해법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쌓이고 쌓여, ‘싸우는 유가족들’의 단식과 농성으로 마련된 법이다. 아직 중대재해법을 적용해서 판결한 사고는 단 한 건도 없다.

‘중대재해법이 기업경영을 위축시킨다’고 말했던 후보자가 당선되자, 기업은 새 대통령이 중대재해법을 ‘손질’해 줄 거란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은 윤석열정부가 손댈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더는 일하다 죽지 않아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공정과 상식’은 문재인 정부나 윤석열 당선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선인은 중대재해법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것을 멈추시라. 지금은 법을 제대로 집행해야 하는 때다. 실제로 적용해봐야 중대재해법의 효과를 우리 사회가 알 수 있다. 법집행을 위축시켜 실효성을 약화시키는 어떤 의도나 행위를 당장 멈추시라. 멈춘 자리에서 유가족과 산재노동자의 말을 들으시라. 지금은 후보자의 말 대신 당선인의 귀가 필요한 시간이다. 당선인도 당선인이 처음이니까.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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